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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 스님 원고 4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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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행 스님 작성일20-01-29 16:29 조회1,8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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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한암 스님에 대한 회고담

 

 

1936년(불기 2963년, 61세)은 한암(漢岩) 스님이 환갑을 맞이한 해입니다. 평소에도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하셨던 한암(漢岩) 스님의 엄명에 따라 환갑잔치는 산내 대중들이 상원사 경내에 모여 점심을 같이 먹고 스님의 건강을 축원하는 조촐한 자리로 마련됐습니다. 떠들썩한 잔치를 마다하고 소박한 생신 상을 받은 스님께서는 대중들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절을 찾아 집을 떠나면서 부모님께 지은 죄, 중노릇마저 제대로 못하여 불가에 지은 죄’ 양가 득죄(兩家得罪)를 면하기 위해서는 중이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중답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이 해야 할 일은 참선에 주력하고, 경전 공부를 열심히 하며, 지극정성으로 염불에 임해야 하고, 제사나 축원 기도 등의 의식 집전을 능통하게 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가람을 수호하는 일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이 말씀은 곧 승가 오칙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한암(漢岩) 스님의 일상은 중답게 사는 일의 실천이었습니다. 근검절약도 빼놓을 수 없는 덕목으로, 한암(漢岩) 스님 회상에서 수행 정진하면서 스님의 검소한 생활을 직접 목격한 분들의 후일담이 참 많습니다. 『그리운 스승 한암(漢岩) 스님/김광식/민족사』에 실린 스님들의 회고담을 중심으로 한암(漢岩) 스님의 검소하고 질박한 생활뿐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 수행 등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운 스승 한암(漢岩) 스님』은 저자인 김광식 교수가 2004년 12월부터 1년 동안 한암(漢岩) 스님과 인연이 깊은 스님과 재가자 등 총 25명을 만나 채록한 내용을 묶어 2006년 4월에 펴낸 책입니다.

 

 

1931년 한암(漢岩)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생식 6년, 장좌불와 7년의 고행 정진을 했던 동성(東星, 1909~2011) 스님은 대중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은 첫째로 염불, 간경, 예식, 가람 수호 같은 것을 배워야 한다며 예식을 의무적으로 가르치셨던 한암(漢岩) 스님 덕분에 상원사 출신은 다 예식과 염불을 할 줄 알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스님은 세세한 것, 예를 들면 지붕에 기와 덮는 법, 문 바르고 도배하는 일, 빨래하고 목욕하는 것까지 말씀하셨지. 내가 정식으로 출가한 후 언제인가 스님이 직접 『초발심자경문』을 가르쳐 주셨고. 식기 닦는 것, 위패 접는 것을 세밀히 가르쳐 주셨어. (중략)

 

상원사에서는 봄이 되면 감자 심는다고 변소를 치거든. 그러면 한암(漢岩) 스님은 탄허부터 불러서 “너부터 들어가라.”라고 하셨어. 바지는 느지렁한 상태에서 변소를 치니 그 똥물이 옷에 묻고 그랬어. 그것은 아끼는 상좌지만 솔선해서 해야 한다는 말이지.

 

동성 스님은 글씨를 쓰고 싶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이를 만류하는 한암(漢岩) 스님에게 불만이 컸던 터라 스님의 말씀을 어기고 뒷방에서 혼자 글씨를 쓰곤 하셨는데, 어느 날 이를 보신 한암(漢岩) 스님께서 동성 스님에게는 아무 말도 안 하시고, 오히려 옆에 있던 탄허 스님을 혼을 내시더랍니다. 

 

그래 나중에 내가 스스로 잘못 찾아왔다고 생각했어. 저렇게 편벽한 사람이 무슨 도인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또 그때 기분이 나쁜 것은, 탄허를 위해서는 수련소도 짓고, 선방에서 강의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면서 나는 못 쓰게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어. 사중 돈을 쓰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아버지가 돈을 보내서 그 돈으로 신문지를 사서 쓰는데, 야단을 치려면 나를 불러 종아리를 치든가 목침으로 패든가 할 일이지 왜 탄허를 혼내느냐는 것이지. 더욱이 한암(漢岩) 스님은 탄허만 생각하고 나는 생각 안 하니 분통이 나서 참을 수 없었어. 그렇다고 스님에게 항의할 수도 없고.

 

나는 눈길을 헤치고 보궁에 가서는 대성통곡을 했어. 울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이제 오대산이 마지막이다.”라고 하였지. 그런 생각을 하니 더욱더 눈물이 나더라고. 이제 오대산도, 보궁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한참 우는데 바깥에서 사람 소리가 와글와글해. 수백 명이 온 것 같더라고. 속으로 웬 사람들이 왔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 그래서 울음을 그치고 밖에 나가니 아무도 없어. 보궁에서 내려오면서 ‘이상하다. 내가 분명히 수백 명의 소리를 들었는데….’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은 부처님이 공청을 했다고 여겨졌어. 그러면서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판단하였지. 한암(漢岩) 스님 말씀이 다 이유가 있을 터인데 내가 오해를 했구나 하면서, 오대산을 떠난다는 생각을 바꾸었어.

 

분통이 나서 보궁에 올라가 대성통곡을 하고 왔다는 동성 스님의 말을 듣고 “나도 요즘엔 글씨를 쓰지 않지 않느냐? 그러니 너도 쓰지 마라.”라고 하셨다는 한암(漢岩) 스님의 자애로움이나, “제가 스님의 가르침을 어겼는데, 이제는 다시는 글을 안 쓰겠습니다.”라고 답한 동성 스님의 순박함이 사제지간이 아니라 마치 부자지간처럼 정겹게 느껴집니다. 동성 스님에게 한암(漢岩) 스님은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을 겁니다. 

 

스님이 돌아가신 후에 상원사에 가 보니 스님의 사진만 걸려 있어. 나는 엄청 울었지. 스님의 방에 들어가니 스님의 생각에 뼈가 저리는 듯하였어. 살아서 나에게 대할 때에는 몰인정하고 냉정하셨지만, 어떤 때에는 온화하고 귓속말로 속삭이시고, 때로는 방망이로 맞기도 하였으나, 막상 가시니 자상한 모습이 새록새록 일어나더라고.

 

한암(漢岩) 스님은 내 평생의 좌우명을 주셨어. 지금도 나는 스님이 주신 자훈인 겸손, 관용, 검소를 지키고 있어. 늘 그걸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지.

 

나는 속가의 아버지 생각은 잘 안 나는데 한암(漢岩) 스님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나. 나를 그렇게 가르쳐 준 은혜를 생각하면, 나의 법으로도 스님의 은혜가 크며, 인정으로도 참으로 나는 정이 많이 들었지. 내가 볼 때 한암(漢岩) 스님의 수행은 고금을 막론하고 철저하였으며, 사리판단이 매우 밝으신 분이었어.

 

 

1935년 유점사에서 만허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후 삼본사 승려 연합 수련소에서 2년간 공부한 범룡(梵龍, 1914~2005) 스님은 운수납자가 되어 전국의 선방을 찾아다니며 참구했던 분입니다. 1941년 상원사에서 한암(漢岩) 스님을 계사로 보살계를 받은 후 6.25 전쟁 때도 피란을 가지 않고 만화 스님과 함께 스님을 시봉하며 입적을 지켜보셨던 스님은 한암(漢岩) 스님을 서릿발처럼 엄하면서도 자비롭고 진실한 분이라고 기억합니다. 절대 자기 자랑하는 일이 없고, 남 흉보는 일도 없으며, 밤새도록 앉아서 참선하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도인도 저렇게 일구월심으로 공부하는데’ 하는 반성을 하면서 자신을 채찍질하셨다고 합니다. 

 

1937년 삼본사 승려 연합 수련소에서 공부하면서 4년 동안 한암(漢岩) 스님 회상에서 수행 정진한 설산(雪山, 1919~2007) 스님은 한암(漢岩) 스님을 대단한 근검절약가라며, 스님의 근검절약 덕분에 많은 대중이 그 산중에서 배곯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고 회상하십니다.

 

간혹 젊은 수좌들이 조실(한암(漢岩)) 스님에게 이의를 제기해요. “맨날 왜 죽만 줍니까?” 하면서. 저도 처음에는 못 먹겠어요. 그런데 1년 먹고 나니 소화도 잘 되고, 그게 약이에요. 어느 미련한 수좌가 매일 죽 먹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자 한암(漢岩) 스님께서 “그러면 그대는 죽을 먹지 말고, 죽 대신 냉수를 하루에 세 번 세 사발을 먹어 봐라. 그러면 네가 장사가 될 것이고 힘을 쓸 것이다.”라고 하셨어요. 그 수좌가 하루를 냉수만 먹어 보니 눈이 쏙 들어가고 죽겠지 않겠어요? “아이고! 죽이라도 먹겠습니다.” 하였어요. 그래 한암(漢岩) 스님께서 “네가 죽 먹는 법을 아는구나.” 하셨지요. (중략)

 

다른 사람들은 그분의 근검절약을 놓고 “한 푼을 아낀다.”, “절약을 한다.” 말들을 하지요.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그 산중에서 80명씩 사는데 근검절약을 안 하면 어떻게 먹습니까? 누가 쌀을 가져옵니까? 그러니 아침에 죽을 먹고 그랬지요.

 

영암 스님이라고 살림살이 잘하기로 유명한 스님이 있었잖아요. 그 스님이 오대산 감무를 하시면서 한암(漢岩) 스님으로부터 돈을 아끼고 하는 것을 배우신 거예요. 그분이 저에게 “내가 오대산의 한암(漢岩) 스님에게 배웠어.”라고 하였어요.

 

설산 스님에게는 특별한 기억이 하나 더 있습니다. 상원사에서 수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한암(漢岩) 스님께서는 금강경 강론을 쉬고 어머니를 위한 설법을 해 주고, 대중에게도 어머니의 영가 천도에 동참하라고 권유하며, 49일 동안 기도하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이에 감동한 설산 스님이 일어나 한암(漢岩) 스님과 대중 스님들에게 오체투지의 절을 했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참선과 간경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늘 법당에 모신 어머니의 위패에 가서 기도를 할 수 있게 배려하셨다고 하니, 스승의 큰 자리는 이렇듯 살피고 아우르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암(漢岩) 스님의 인가를 받고 상원사에서 3~4년 한암(漢岩) 스님을 모시고 공부하면서 보문 스님과 같은 좋은 도반을 만났다는 화산 학명(華山鶴鳴, 1019~2013) 스님 역시 한암(漢岩) 스님께서 시주 물 아끼는 것에 매우 철저하셨으며, 솔선수범하여 남은 음식을 드시면서 “이 음식을 여기까지 가져오느라고 얼마나 노고가 많았는데 그것을 알지 못한다.”라며 안타까워하셨다고 전합니다.

 

상원사에서는 소금으로 양치를 못해요. 이를 닦을 때에도 치약이 없어 주로 소금으로 양치질을 하는데 상원사에서는 버드나무를 다듬어서 쓰고 그랬지요. “너희들이 소금을 만들어 내냐?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40리를 땀 흘리고 지고 오는데 그것으로 양치질한다.”라고 그러세요. 이것은 우리에게 공부 잘하라는 뜻인 줄 알게 하려고 강조한 것이지요. 시주 물 은혜를 귀히 알고 공부를 잘할 수 있도록 절약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것이 기본적으로 몸에 배어서 나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어요. 그 정신은 『범망경』에도 다 있잖아요. (중략) 차라리 펄펄 끓는 쇠를 몸에 감을지언정 공부도 안 하면서 남의 시주에게 공양을 받지 말라고.

 

한암(漢岩) 스님의 검소함은 그것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노고와 그것이 내 앞에 놓이고 내 손에 쥐어지기까지의 수고도 함께 알고 감사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했습니다.  

 

훗날 만해 한용운 스님과 함께 불교 혁신 운동,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한 선지식 화산 스님은 『그리운 스승 한암(漢岩) 스님』의 저자 김광식 교수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리운 스승’ 한암(漢岩) 스님을 떠올리며 눈물을 감추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화산 스님이 흘리신 눈물의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창조(昌祚, 1913~?) 스님은 공부를 시켜 준다는 말에 끌려 18세에 삼척(현, 동해시)에 있는 삼화사(三和寺) 만운 스님 아래 출가하여 월정사에서 행자 노릇을 하며 6년간 공부한 후, 월정사 공비 생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오신 분입니다.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중노릇을 잘 하기 위한 특별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상원사 선방에 들어가 동안거, 하안거를 나며 정진했던 학구파 스님의 기억 속 한암(漢岩) 스님은 어떤 분일지 궁금합니다.

 

안거 시작할 때와 마칠 때 법문을 하시는데, 그게 참으로 인상적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강사들은 반드시 어려운 부처님의 말씀, 조사의 어록을 외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스님은 그런 것이 전혀 없어요. 그냥 담담하게, 알기 쉽게 일러 주셨어요. 즉 글귀를 갖고 법문을 하지 않아. 그리고 평상시에도 제자고 스승이 없고, 다른 대중이나 모든 사람에게 하심(下心)으로 똑같은 대우를 하셨지요. 

 

스님은 대중들과 똑같이 하셨어요. 큰스님이라고 빠지는 때가 없어요. 당시 상원사에는 천도재, 제사가 많이 들어왔어요. 공양물인 쌀, 떡, 의복, 음식, 약이 많이 쌓여 있어요. 그러면 대중들에게 똑같이 갈라 주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인자해요. 그것이 생활화된 것으로 보여요. (중략)

 

그분의 특징은 학인이나 스님들이 잘못하였을 적에 그 잘못된 이유를 이야기하지 않고, 듣기 좋게 이야기를 해 주시지요. 이유를 중언부언하지 않아요. 만일에 문제가 있으면 “이렇게 하는 법이 사람이 사는 법이다.”라고 말씀하셨지. 

 

도원(道源, 1928~ ) 스님은 열네 살에 출가해 열여덟 살이 되던 1945년, 글공부를 하고 싶어서 한암(漢岩) 스님이 계신 상원사를 찾아와 공양주로 2년, 채공으로 2년을 지내고 한암(漢岩) 스님을 2년간 모셨던 분입니다. 한암(漢岩) 스님을 모셨던 시자(侍者)였고, 후일 월정사 주지를 지내셨던 만큼 도원 스님의 기억은 더욱 각별합니다. 도원 스님에게 한암(漢岩) 스님은 도량에 다니다가도 쌀 한 톨, 팥 하나라도 일일이 다 주울 정도였고, 방에도 조그만 책상 하나뿐이고 아침에는 죽, 점심은 밥, 오후에는 불식을 철저히 지키셨던 검박한 분, 그러면서도 선교를 겸비하고 청백 가풍이 철저했던 스승이었습니다. 

 

한암(漢岩) 스님은 평소 우리에게 가르치시길 “중노릇을 잘 하려면 부처님 탁자 밑에서 살아야 한다.”라고 하셨어. 우리에게 늘 “중노릇을 잘하려고 생각해야 한다. 절대 딴 생각을 갖고 그곳을 떠나서는 안 된다.”라고 하신 이 말씀은 ‘중은 독살이 하면 죽는다.’라는 뜻이지. 이는 ‘중은 절집 생활을 해야 한다, 대중처소를 떠나지 않아야 한다.’라는 것을 강조하신 뜻이지. 

 

그다음으로 한암(漢岩) 스님은 다섯 가지를 잘 못하면 중이 될 수 없다고 하셨어. 그 다섯 가지는 참선하는 것, 간경 보는 것, 염불, 대중을 위해 봉사하는 것, 중생에게 교화(포교) 하는 것이었어. 이 다섯 가지에 참여하지 못하면 중이 아니라고 하셨어. 한국불교 현실을 볼 때 이 다섯 가지에 참여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씀하셨어.

 

그리고 늘 말씀하시는 것은 말세 중생들은 근기가 허약하기 때문에 수승한 인연을 맺기가 어렵다고 하시면서, 참선하는 대중이 모여 있는 곳이었지만 예불을 마치고는 꼭 관음보살에게 정성을 다하여 부지런히 기도하는 일을 두 시간씩 하셨어. 칠십 넘은 노인이 첫새벽에 일어나셔서 꼬박 서서 두 시간씩 기도를 하시고 그랬어. 우리에게도 두 사람씩 짝을 이루어 예식을 가르쳤어. 한 사람은 법주를 하고, 다른 사람은 바라지를 하고. 천수를 치면서 제 위치에서 관음 정근을 하도록 하셨지. (중략)

 

중은 인과를 제대로 알아야 하고, 사리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하셨지. 스님은 자주 지인과 명사리를 말씀하셨는데, 그분처럼 인과를 철저히 알고 사리에 밝은 스님도 드물어. 인과를 분명히 알면 중노릇을 하지 말라고 떠밀어도 저절로 중노릇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셨어. 그리고 사리 판단을 잘 해야 한다고. 사람이 세상 살면서 사리 판단을 잘못하면 자기 생활도 그르친다고 하셨지. 

 

중은 시주 물건을 무섭게 알라고 하셨어. 도량을 거닐다가 쌀이나 팥, 무 껍질, 콩 등 먹을 것을 보면 그것을 주워서 부엌으로 가져오시거나 애들을 불러서 전해 주셨어. 음식물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공이 든 것인지를 모르면 안 된다고 하셨지. 

 

궁녀나 신도들이 두루마기나 버선 등을 보내오면 1년간 전부 모아두었다가 음력설이 되면 원주에게 그것을 전부 내놓으라고 하여 당신의 옷 두 벌만 남기고는 모두 대중에게 나눠 주라고 하셨어. 하여간에 스님은 검박하게 생활하셨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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