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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의 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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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11-05 14:53 조회3,2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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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의 태생

조계종의 분규는 지난 928일 제26대 총무원장으로 원행스님이 당선되고 1017일 집행부 인선이 마무리됨으로써 일단 수습국면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분규의 역사가 오래되었고, 그 원인이 세속화에 따른 윤리적 타락과 정치권력에 예속되는 어용성이 체질화된 것이라는 점에서 완전한 해결에 이르기까지는 멀고도 어려운 문제가 가로 놓여 있다.

근본적인 문제는 역사의식의 부족으로 식민지불교의 잔재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에 대한 인식 자체가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일제 강점기의 불교사 연구는 구조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각 사찰이나 문중별로 특정인을 현창하는 사업을 불교사 연구로 혼동하는 문중사학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앙 총무원과 지방 본사 간 행정체제도 개선하고 시대에 맞는 불교철학, 수행방법 계발, 종지종통정립이 필요하며, 정치권력 지향체질, 물질추구 욕망, 윤리적 타락을 정화해야 한다.

 

돌이켜 보면 해방된 이후 70여 년간 조계종의 역사는 끊임없는 분규로 점철되어 왔는데, 식민지불교의 폐해를 비판하고 그 잔재를 극복하려는 역사의식의 부족이 세속화와 어용성을 체질화 시켜온 결과이다.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유교이념의 지배체제 아래에서 억압받아 침체 되었던 불교는 근대 들어와 일제의 침략으로 또 한 번의 불행한 굴절을 경험하게 되었다. 일본제국주의는 정치와 종교는 새의 두 날개’, 또는 수레의 두 바퀴같은 관계라고 하면서 한국 침략의 시작 단계부터 일본불교를 식민지 개척의 첨병으로 이용하였다. 군사력을 앞세운 정치적 경제적 침략과 아울러 불교를 첨병으로 하는 정신적 문화적 침투를 시도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위로는 개화파 같은 지배층을 포섭하고 아래로부터 널리 민중을 교화함으로서 한국을 전면적으로 종속화 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국가주의적인 일본불교의 각 종파들도 정부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정치적 침략의 단계마다 예외 없이 개입하여 종교담당 관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동시에 자신의 종파로서 한국불교를 장악하려는 노력을 경쟁적으로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10년 강점될 시기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조동종이라는 특정종파에 한국불교 전체가 예속당하는 협약을 체결하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일본불교 각 종파의 한국불교 장악을 저지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 이었다. 조동종을 비롯해서 일본불교 각 종파의 한국불교 장악은 일체 금지하였는데, 본국 불교종파의 총본산과의 연결은 무단적인 식민통치에 장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초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시다케는 191163사찰령’, 78사찰령시행세칙을 반포하고, 본말사 제도를 수립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사찰령과 본말사 제도를 통하여 한국의 불교교단을 조직적으로 편제하여 31개 본사로 나누는 분할통치 방식을 취하였다. 그리고 조선총독이 불교계의 인사권과 재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본사 주지들의 사찰 안에서의 권한을 확대해 줌으로써 식민통치에의 협력을 유도하였다. 그 결과 사찰 주지들은 친일 지주적인 성격을 띠게 되어 앞 다퉈 재산을 축적하고 처첩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른바 대처승들의 숫자는 날로 늘어나서 해방될 때에 이르면 절대 다수가 되었으며, 교단의 구조적인 문제로 심화되었다. 그런데 조선총독이 불교계의 인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한 것과 같은 정책은 일본 본국에서도 시행되지 못한 것이었다. 일본에서도 일찍이 1899· 1929· 1935년 여러 차례 종교단체법의 제정이 추진되었으나, 불교계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하였으며, 한국불교계에서 총본산 건설이 추진되던 시기인 1939년 국가총동원법이 성립된 이후 비로소 제정될 수 있었다.

1937년 일제는 중일전쟁을 도발한 이후 전시총동원체제로 전환하면서 식민지불교정책을 지금까지의 분할통치 방식에서 통일기관 설립의 방향으로 변경하여 총본산의 설립을 적극적으로 권유하고 지원하였다. 그리고 전쟁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가던 1940년에는 총본산 설립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던 방식에서 직접 주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변경하였다.

이제 조선총독부가 직접 추진하게 되면서 총본사 건설 사업은 일사천리로 빠르게 진전되었다. 앞서 193810월 총본산 각황사의 이전공사가 완료된데 이어 194012월에는 총본사태고사법을 제정하여 인가신청을 하였다. 그리고 1941423일에 조계종총본사태고사법이 인가 반포됨으로써 통합종단으로서의 조선불교 조계종이 발족되었다.

태고사와 조계종이라는 명칭은 한국불교계의 오랜 염원에 부응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불교 전통을 계승발전 시켜 준다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불교계의 자발적인 협조를 끌어내기 위한 조선총독부의 고차원적인 술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앞서 1911사찰령에 의해 본말사 체제를 성립시키면서 조선초기의 선교 양종을 끌어다 종지와 종명으로 내세웠던 조선총독부의 의도가 재연된 것이며, 한 단계 발전된 것이다. 결국 1941년의 조계종은 당시 한국불교계의 여망에 부응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조선총독부의 필요성에 의해 새로 성립된 신흥 종단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계종이라는 통합종단과 태고사라는 총본사를 설립 하면서도 태고사법의 상위법령인 사찰령사찰령시행세칙을 그대로 존속시키고, 31본산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리고 총본사인 태고사와 31본사 주지의 인사권이나 재산관리권 등의 실질적인 권한은 조선총독이 그대로 장악하고, 본사 주지들의 특권도 그대로 유지토록 하였다. 이로써 조선총독부는 총본산을 통해 31본산체제를 통합 관리하여 전쟁수행을 위한 국민총동원체제에 효과적으로 부응하게 되었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조계종의 성립을 민족불교의 완성으로 평가하려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조계종의 창립은 한국불교의 발전과는 무관한 것이며, 친일적이고 어용적인 식민지불교의 완성이라는 의의를 갖는 것이다. 또한 중앙의 통합관리기구와 지방본사 사이의 교단행정체제상의 구조적인 모순을 갖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조계종은 일본제국주의에 부응하는 어용적인 성격, 교단행정체제상의 구조적인 모순을 가지고 일제의 전시총동원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한국불교는 일제식민지불교의 청산과 불교교단의 개혁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갖고 출발하였다. 해방 직후 불교계는 일제식민지불교의 청산을 표방하여 일제의 불교 관계법령의 폐지와 조선불교교헌의 제정, 31본말사제도의 개편, 조계종의 종명변경, 조계종 임원의 퇴진과 새로운 집행부의 구성 등을 추진하였으나, 교헌의 제정과 종명의 변경 이외에는 어느 것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일제법령의 폐지 문제는 미군정 당국의 보류조치로 1962불교재산관리법이 제정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인적청산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의 친일적인 인물들이 재등장하였으며, 식민지불교의 핵심적인 주체인 본사주지와 대처승의 정리문제 등은 한동안 거론도 되지 못하였다.

1954년 이후의 정화운동’, 1962년의 통합종단성립, 1970년의 대처승과 결별, 1994년 개혁종단 출발 등 변화를 겪어왔으나, 정치권력에 의지하려는 어용적인 체질, 물질적인 욕망추구, 윤리적인 타락의 현상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으며, 중앙의 총무원과 지방본사 사이의 교단행정체제상의 모순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그보다도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역사의식의 부족으로 식민지불교의 잔재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에 대한 인식 자체가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일제 강점기의 불교사연구는 구조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각 사찰이나 문중별로 특정인을 현창하는 사업을 불교사 연구로 혼동하는 문중사학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교학 연구의 부진과 화석화된 간화선에의 집착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서 이 시대에 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불교철학과 수행방법을 계발해야 하며, 종단으로서의 종지와 종통을 정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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