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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역사와문화]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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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14-02-05 10:56 조회4,1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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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시대: 오대산 개산과 월정사 창건의 연원

 

4. 신의두타(信義頭陀); 화엄신앙과 선문(禪門)의 결합

 

신효거사 때만 해도 움막으로 기록되던 월정사가 어엿한 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범일의 제자 신의에 의해서였다. 신의는 범일국사의 제자라는 사실만 전할 뿐, 자세한 행장이나 사상은 알 수 없다. 범일국사(810~889)는 신라의 선승으로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사굴산문(闍堀山門)을 개창하였다. 그는 831년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馬祖)의 제자인 염관제안(}官齊安)의 문하에서 유학하고 846년에 귀국하였다. 범일의 전기를 『조당집』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때 고향에 돌아와 불법을 펼 생각을 내어 회창(會昌) 6년 정묘년 8월에다시 뱃길에 올라 계림정(鷄林亭)에 돌아오니, 정자 위를 비추는 달빛은 현도(, 해동의 다른 말이다)의 성에 흐르고, 교교한 여의주의 빛은 청구(靑丘)의 경계를 끝까지 비추었다.

대중(大中) 5년 정월에 이르러 백달산(白達山)에서 좌선하고 있으니, 명주(溟洲)의 도독인 김공(金公)이 굴산사에 주석할 것을 청하였다. 한 번 숲 속에앉아 들어가 산 지 40여 년 동안 줄지은 소나무로 도를 행하는 행랑을 삼고, 평평한 돌로써 좌선하는 자리를 삼았다.

어떤 이가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의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6(六代)가 지나도 잃은 적이 없느니라.”

“어떤 것이 대장부가 힘써야 할 일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부처의 계단을 밟지 말고, 남을 따라 깨달으려 하지 말라.”

함통(咸通) 12 3월에는 경문대왕이, 광명(廣明) 원년에는 헌강대왕이 모두 특별히 모시는 예를 다하여 멀리서 흠앙하였다. 국사에 봉하기 위해 모두 중사를 보내어 서울로 모시려 했으나 선사가 오랫동안 곧고 굳은 덕을쌓았기에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갑자기 문덕(文德) 2년 기유년 4월 말에문인들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곧 먼 길을 떠나려 하니, 이제 너희들과 작별을 고하노라. 너희들은 세상의 감정으로 공연히 슬퍼하지 말라. 다만 스스로 마음을 닦아서 종지를추락하지 않게 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는 5 1일에 오른쪽 겨드랑이를 대고 발을 포개고 굴산사의 윗방에서 입멸하니, 춘추는 80세요, 승랍은 60이며, 시호는 통효(通曉), 탑호는 연휘(延徽)이다.

<『조당집(祖堂集)』 권제17, 「명주굴산사고통효대사(溟洲崛山故通曉大師)」>

 

범일은 귀국 후 명주의 굴산사(崛山寺)에 머물며 선풍을 드날려 사굴산문을 형성하였다. 범일 입적 이후 사굴산문은 제자 개청(開淸, 835~930)이 이끌어 나갔다. 신의 역시 범일의 제자였으나, 개청이 스승의 뒤를 계승한것으로 보아 신의의 법랍과 나이는 개청보다 아래로 추정된다.

스승 범일이 889년에 입적하고, 개청이 산문을 이어받자 십성제자(十聖弟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신의두타는 길을 떠나 새로운 지역에 선풍(禪風)을 일으키기 위해 여러 곳을 물색하였다. 마침내 오대산 자락에 이르러 자장이 문수보살을 만나기 위해 지은 움막 자리를 발견하고는 이곳에 법당을 세우니, 비로소 월정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범일의 제자 중에서오대산과 관련한 행적이 나타나는 인물은 행적(朗空行寂, 832~916)이다. 행적은 오대산 수정사에 머무른 적이 있고, 입당유학 후에 범일의 제자가 되었으며, 897~912년 사이의 기간에 명주 교외에서 주석하였다는 기록이있다. 곧 범일의 제자 중에서 신의두타로 불릴 만한 인물로 월정사에 주석하였을 가능성이 가장 큰 인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 인물이 누구이든 간에 범일의 제자가 화엄과 문수신앙을 중심으로 하던 오대산 월정사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였다는 것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신라 하대의 많은 화엄종 출신 승려들이 선종으로 전향하였던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 사실 신라 화엄종 출신 승려들의 선종으로의 전향은, 신라 화엄의 주류를 이루었던 의상계 화엄종이 선종과 아주 유사한 사상적 함의를 가지고 있었음은 물론 그 깨달음의 사자상승하는 방식 역시 아주 유사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신라 하대에 입당유학하여 선종으로 전향한 승려의 대개가 의상계 화엄종 출신의 승려였다는사실은 사상적 차별성 못지않게 의상계 화엄과 남종선 사이의 동질성을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신의두타의 시기를 전후로 하여 월정사는 오대산 신앙의 새로운 중심지로 등장하는 한편, 신라 하대와 고려 초기에 사회 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선문의 일원으로서의 입지 역시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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