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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역사와문화]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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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14-02-05 10:24 조회4,3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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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시대: 오대산 개산과 월정사 창건의 연원



2. 보천태자와 성덕왕의 시대; 오대산 성지의 국가적 조영


자장 이후 오대산은 문수신앙의 성지로서 출발하여 통일신라시대에는 다양한 불보살이 상주한다는 성지신앙으로 확대되었다. 먼저 「명주(溟州)오대산 보질도태자전기(五臺山 寶叱徒太子傳記)」에 전하는 천(寶川)과 효명 (孝明)태자의 오만진신 신앙을 살펴본다.

 

대저 오대(五臺)라고 하는 것은 산이다. 처음으로 백두산에서부터 구불구불 비스듬히 남쪽으로 내려와 굴곡이 백 번 돌아쳐서 구르니, 금강이라 하고 설악이라 하였다. 또 다시 굴러 백여 리를 달려 홀로 우뚝 솟아 하늘과 맞닿아 서 있는데 속세에 구애 받지 않는 한 사람의 장부와 같으니, 마치 백만 군중(軍中)을 호령하는 것과 같으므로 비로봉(毘盧峯)이라 한다.

아래로는 여러 봉우리들이 열을 지어 있는데, 마치 분노하는 것 같기도 하고 크게 소리내어 우는 것 같기도 하다. 구역을 달리하는 기이한 봉우리들은 그 수를 모두 헤아릴 수 없으므로 그 대강을 논하여 보면, 동쪽에는 만월(滿月)이 있고, 서쪽에는 장령(長嶺)이 있으며, 남쪽에는 기린(麒麟)이 있고, 북쪽에는 상왕(象王)이 있으며, 중아에는 지로(地爐)가 있다. 이런 까닭에 오대산이라 하는데 모두 여러 부처와 보살이 상주하는 곳이다.

옛날 자장율사가 중대 비로봉에 불뇌 및 정골을 봉안하여 영험함과 상서로움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호위를 두고 주위를 살폈다. 혹 재일(齋日)이 되면 일시에 광명을 밝혔다. 신라 왕자 정신과 효명 두 태자가 유람하다가 하서부(河西府)(지금의 강릉군이다.) 세헌(世獻) 각간(角干)의 집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고, 그 다음날 큰 고개를 넘어 성오평(省烏坪)에 도착하였다. 여러 날 즐겁게 유람하였다.

태화(太和) 원년 정유년(647) 8 5 (「신라본기」에는 법흥왕 기미년에 이르러 (연호를) 사사로이 세웠으며, 진덕왕5(651)에 비로소 중국 연호를 시행하였다.) 형제 두 사람이 함께 이 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그 무리 1천 명은 이때 두 태자를 잃고 모두 환국하였다.

정신태자는 중대(中臺) 남쪽 기슭 진여원(眞如院)의 터 아래 동남쪽의 밭두둑에 청련(靑蓮)이 핀 것을 보고 그 땅에 초암(草庵)을 짓고 거처하였다. 효명태자는 진여원에서 동북쪽으로 6백여 보를 가서 북대(北臺) 남쪽 산 아래에 청련이 핀 것을 보고 또한 초암을 짓고 거처하였다.

형제 두 사람은 한마음으로 예경(禮敬)하며, 동대에 올라가서 아촉여래(閦如來)를 우두머리로 하는 1만 관세음보살의 진신이 상주하는 것을 보았으며, 남대에 올라서는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하는 1만 지장보살의 진신이 상주하는 것을 보았다. 서대에 올라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우두머리로 하는 1만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의 진신이 상주하는 것을 보았고, 북대에 이르러서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하는 1만 미륵보살의 진신과5백 대아라한의 진신이 상주하는 것을 보았다. 중대에 도착하여 비로자나여래(毘盧遮那如來)를 우두머리로 하는 1만 문수보살의 진신이 상주하는 것을 보았다. 또한 진여원 가운데에서 문수대성을 알현하였다.

매일 아침에 공경하였는데, 36가지 모습으로 변하여 출현하였다. 혹은 불면(佛面)의 모습을 지어 보이고, 혹은 불안(佛眼)의 모습을 지어 보이며, 혹은 불수(佛手)의 모습을 지어 보이고, 혹은 불족(佛足)의 모습을 짓고, 혹은 만불(萬佛)의 모습을 지어 보이고, 혹은 만등(萬燈)이 빛나는 모습으로 나타나며,혹은 보탑(寶塔)의 모습을 짓고, 혹은 금고(金鼓)의 모습을 나타내었다.

혹은 금종(金鐘)의 모습을 나타내고, 혹은 금륜(金輪)의 모습으로 보이며, 혹은 금루(金樓)의 모습을 짓고, 혹은 금교(金橋)의 모습을 나타낸다. 혹은 금옹(金甕)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혹은 금구(金鉤)의 모습을 짓고, 혹은 금전(金田)의 모습을 보이며, 혹은 은전(銀田)의 모습을 지어 보이고, 혹은 금저(金杵)의 모습을 보였다.

혹은 오색원광(五色圓光)의 모습을 띠고, 혹은 오색광명(五色光明)의 모습을보이며, 혹은 길상초(吉祥草)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혹은 청련화(靑蓮花)의모습을 짓고, 혹은 출뢰(出雷)의 형태를 보여 준다. 혹은 가중미용출(家中米湧出)의 모습을 짓고, 혹은 가중오색광(家中五色光)의 모습을 띠며, 혹은 지신용출(地神湧出)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혹은 신통한 모습을 보여준다.

혹은 금봉(金鳳)의 형태로 나타나며, 혹은 금오(金烏)의 형태를 짓고, 혹은작조(雀鳥)의 모습을 지어 보이며, 혹은 청사(靑蛇)의 형태로 나타나고, 혹은백상(白象)의 모습을 띠었다. 혹은 유저(遊猪)의 모습을 짓고, 혹은 마산(馬産)의 모습을 보이며, 혹은 우산사자(牛産獅{)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혹은계산봉(鷄産鳳)의 모습을 짓는다.

두 왕자가 이 신비로운 변화를 보고, 매일 아침 새로 물을 긷고 차를 달여서 1만 문수에게 공양하며, 밤이 되면 각기 암자로 돌아와 수도하였다. 날이 오래되고 연수가 깊어지자, 나라 사람들이 점차 두 왕자가 거주한 처소를 알게 되었다. 이에 성오평(省烏坪)의 이름이 고쳐 경평(京坪)이라 하였다.

당 측천(則天) 사성(嗣聖}) 19년 임인년(702)에 이르러 신라 왕이 죽었으나 자식이 없었다. 나라 사람들이 두 왕자를 맞아들이고자 장군 4명을 먼저 효명태자 앞에 보내 만세를 불렀다. 이때 오색의 구름이 출현하여 온 나라가7일 낮 7일 밤 동안 환하게 빛났다. 군신들이 그 빛을 따라 산에 도착하여정신을 왕위에 맞이하려고 청해 머물렀으나, 부득이하게 효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효소왕이 자식이 없어나라 사람들이 신문왕의 둘째 아들 김지성(金志誠)을 세웠는데, 36년 동안왕위에 있었다. 원년 임인년(702)에 제 33대 성덕왕이 되었다.”

당 신룡(神龍) 원년 을사년(705) 8 3일에 왕이 친히 군사와 백성을 거느리고 산에 도착하여 비로소 진여원을 열어 소조문수상을 만들어 봉안하였다.

비구 5명에게 『화엄경』을 길이 읽게 하였으니, 이를 화엄결사라 불렀다. 매해 봄과 가을에 각기 창고의 조() 1백 석, 등유(鐙油) 1석 그리고 본원에 좌지(座地) 2결 등을 하사했다. 또한 모니점(牟尼岾)과 점이점(占伊岾)의 바깥에 있는 시지(柴地) 50결과 백자지(栢子地) 6결을 더 주었다. 진여원으로부터 서쪽으로 6천 보를 허락하여, 정신태자가 머물러 수도하였다.

항상 영동(靈洞 )의 물을 길어 먹었기 때문에 육신이 허공을 올라 비상하니,사강(沙江)의 물길을 건너서 울진대국(鬱珍大國)에 도착하였다. 천굴(天窟)을정하여 들어가서 밤새 독송하여 수구다라니(隨求多羅尼)를 구하여 좇으니,굴의 신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내가 이 굴에 거처한 지 30년이 되었습니다. 금일에야 비로소 수구진전(隨求眞詮)을 들으니, 바라건대 보살계 받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정신태자가 보살계를 내려주니 귀의하였다.

다음날 그 굴이 홀연히 없어지니 심히 괴이한 일이었다. 이로 인하여 20일을 머문 연후에 이내 떠나갔다. 산에 돌아와서 신성굴(神聖窟)에 들어가 50년을 정진하여 수행하였다. 이에 삼십삼천(도리천)의 무리가 매일 내려와서법을 듣고, 정거천(淨居天)의 무리가 또한 내려와서 차()를 바쳤다. 40성중(聖衆)이 높이 10척쯤 되는 공중에서 옹호하였다. 석장(錫杖)이 날마다삼시(三時)에 소리를 내며 방을 세 번씩 돌아다녔으므로 경종으로 삼아 시간에 맞추어 수업하였다. 어떤 때는 문수가 홀연히 보천의 이마에 물을 부어서 성도기별을 주기도 하였다.

성덕왕은 동대의 북각(北角) 아래에 관음방(觀音房)을 창건하고, 안에 원상관음(圓像觀音)을 봉안하였다. 또 청지(靑地) 1만 관세음의 불화를 조성하였다. 항상 대중 5명을 두어 낮에는 『금강광명경(金剛光明經), 『인왕반야대비심주(仁王般若大悲心呪)』 등 8권을 독송하게 하고 밤에는 관음예참(觀音禮懺)을 염불하게 하니, 원통결사(圓通結社)라 불렀다.

남대의 남면(南面)에 지장방(地藏房)을 창건하고, 그 안에 원상지장(圓像地藏)을 봉안하였다. 또 적지(赤地)에 팔대보살을 우두머리로 하는 1만 지장의불화를 조성하였다. 또한 대중 5명을 두어 낮에는 『지장경(地藏經), 『금광반야(金光般若)』를 독송하게 하고, 밤에는 점찰예참(占察禮懺)을 염불하게 하니, 금강결사(金剛結社)라 불렀다.

서대의 남면에 미륵방(彌勒房)을 창건하고, 그 안에 원상무량수불(圓像無量壽佛)을 봉안하였다. 또 백지(白地)에 무량수불을 우두머리로 하는 1만의 대세지(大勢至)를 불화로 조성하였다. 또한 대중 5명을 두어 낮에는 『법화경(法華經)』을 독송하게 하고, 밤에는 미타예참(彌陀禮懺)을 염불하게 하니, 수정결사(水精結社)라 불렀다.

북대의 남면에는 나한방(羅漢房)을 창건하고, 그 안에 원상석가(圓像釋迦)를봉안하였다. 또 흑지(黑地)에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하는 1만의 미륵보살과 5백 대아라한을 불화로 조성하였다. 대중 5명을 두어 낮에는 『불보은경(佛報恩經)』과 『열반경』을 독송하게 하고, 밤에는 열반예참(涅槃禮懺)을 염불하게 하니, 백련결사(白蓮結社)라 불렀다.

중대의 진여원에는 전에 있던 문수소조상을 안치하고, 뒷벽에는 황색 바탕에 1만 문수와 함께 36가지 변화의 형상을 불화로 조성하였다. 또한 대중5명을 두어 낮에는 『화엄경』과 『대반야경(大般若經)』을 독송하게 하고, 밤에는 화엄예참(華嚴禮懺)을 염불하게 하니, 화엄결사(華嚴結社)라 불렀다.

보질도방(寶叱徒房)을 개창(改創)하여 화엄사라 하였다. 그 안에 원통상(圓通像)과 비로자나삼존과 대장경을 봉안하였다. 또한 대중 5명을 두어 연중내내 대장경을 전독(轉讀)하게 하고, 밤에는 신중(神衆)을 염불하도록 했다. 또 진년(趁年)에 백일화엄회를 거행하여 법륜결사(法輪結社)라 불렀다. 이로써 오대(五臺) 오사(五社)의 본사로 삼았다.

또 하원에 문수갑사(文殊岬寺)를 배치하고(又文殊岬加排佛下院), 산 안을 육사도회(六社都會)의 땅으로 삼았다. 또한 정진하는 무리 7명으로 하여금 주야로 항상 화엄신중예참을 하게 하였다. 하서부 도내 8()의 세금으로 각절의 복전(福田)을 삼았다. 무릇 37명의 사사공양의 자금으로 삼은즉 군왕의 수명이 길어지고, 문무(文武)가 협력하여 조화로우며, 만미니 기쁘고 즐거우며, 백곡이 풍요로우니 없는 것이 없음이 이곳이다.(보질도는 정신태자의 아명이다.)

<민지(閔漬)가 기록한 「오대산 성적과 신라 정신태자효명태자전(五臺山聖迹幷新羅淨神太子孝明太子傳); 『오대산사적』; 『조선불교통사』 하편1>

 

이 기록은 일연의 「대산 오만진신」조의 기록과 상당 부분 겹친다. 아마도 민지의 「오대산 성적과 신라 정신태자효명태자전(五臺山聖}迹幷新羅淨 神太子孝明太子傳)」은 일연의 「대산 오만진신」조와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를 합쳐서 새롭게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일연은 이와 같은 오대산의 오만진신 신앙을 『고기(古記)』에서 인용하여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보천과 효명은 신문왕의 아들이고, 효명은 곧 효소왕(孝昭王)이라고 하였다. 일연이 인용한 『고기』가 어떤자료인지 알 수 없고, 또 이를 뒷받침할 만한 역사서가 없는 상황에서 그진실 여부는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물의 역사성이 아니라 오대산이 오만진신의 성지가 되었다는 신앙성이다. 보천과 효명에 의해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는 각각 관음보살지장보살대세지보살오백아라한문수보살이 1만 분씩 상주하는 성지로 거듭나고 있는것이다.

이 기록은 7세기 말과 8세기 초에 걸친 기록으로, 자장에 의해서 출발된 오대산 문수신앙이 오만진신의 성지로 거듭나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특히 지금의 상원사(上院寺)인 진여원(眞如院)에는 문수보살이 매일 아침마다 다른 모습으로 화현하는 문수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705(성덕왕 4)에는 국왕이 진여원을 중창하고, 흙으로 문수보살상을 조성하였으며 화엄사(華嚴社)를 결성하였다. 화엄사는 신앙결사(信仰結社)로서 『화엄경』을 윤독하는 모임이었다. 결사의 원만한 성공을 위해 인근 지방에서 곡식과 기름을 제공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상원사의 문수신앙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훗날 세조가 이곳에서 문수동자를 친견하기도 하였다.

한편 왕위를 마다하면서까지 오대산에 남은 보천태자는 『수구다라니』를 암송하면서 수행을 계속하였고, 입적하기 전에 산중에서 국가를 이롭게 할 방안을 남겼다. 즉 동서남북의 사방 각 대()에 관음방(觀音房)•미타방(彌陀房)•지장방(地藏房)•나한당(羅漢堂)을 두고 중대(中臺)의 진여원(眞如院)에는 화엄결사를 두도록 하였다. 이 밖에도 화장사(華藏寺)에 법륜사(法輪社)를 두고, 오대결사(五臺結社)의 본사로 삼도록 하였다. 또한 문수갑사(文殊岬寺)를 배치하여 결사의 도회소(都會所)로 삼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하면 국왕은 장수하고 백성은 편안할 것이며, 문무(文武)가 모두 화평하고 백곡이 풍성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보천의 당부가 실제로 이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5개의 결사를 주관하는 인물로 정행 복전(淨行 福田)을 지목하고, 결사의 비용을 충당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등 구체적인 시행계획까지 언급하고 있어 이후 오대산에서 이러한 수행과 결사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높다. 보천과 효명의 오대산 수행을 통해 7세기말 신라불교의 다양한 사상과 신앙을 가늠할 수 있다. 즉 이들의 수행과정에 등장하는 경전만 해도『금광명경』『인왕반야경』『천수주(千手呪)『지장경』『금강반야경』『법화경』『불보은경(佛報恩經)『열반경』•『화엄경』•『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문장경(門藏經)』 등 아주 다양하다. 여기에 전통적인 산신신앙까지 포함하여 오대산은 그야말로 화엄신앙과 법화신앙, 밀교신앙 등 신라불교 전성기의 다양한 신앙과 사상을 그대로 함축해 놓았다고 하겠다.

이 기록이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보천태자와 효명태자의 오대산과 인연을 계기로 오대산 전역에 국가적인 불사(佛事)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동대의 북쪽 일각에 관음방, 남대의 남면에 지장방, 서대의 남면에 나한방, 중대에는 문수를 모신 진여원, 보질도가 있었던 곳은 화엄사(오대산의본사), 산의 6(六社)가 모이는 하원(下院) 등이 이때 본격적으로 조영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월정사는 하원(下院)에 해당된느 것으로 보이며,이때 사세가 크게 확장되었을 것으로 보인다.2 자장의 월정사 창건은 그 기록 자체만으로 본다면 본격적인 창건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없지 않다.

그러나 보천태자와 효명태자의 사건을 계기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불사가이루어지고 육사와 하원이 조영되었고 그 중심이 진여원이었다는 사실은,이미 그 이전인 자장의 오대산 문수신앙이 대중들에게 각인되었고, 그것이 보천태자와 효명태자의 사건을 계기로 확산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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