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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역사와문화]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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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14-02-03 17:51 조회4,3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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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신라시대: 오대산 개산과 월정사 창건의 연원

1. 자장(慈藏); 월정사의 창건과 오대산 문수신앙의 시작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산악이 국토의 2/3에 달해 옛부터 산은 민족의 정기가 서린 신성한 곳으로 여겨왔다. 일찍이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이러한 산악숭배사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라의 큰일을 앞두고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제사를 올리고, 자연재해를 물리치기 위해 산악의 정령(精靈)에 기원하는 일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로 이어져 왔다. 신라 때에 이미삼산(三山) 오악신앙(五岳信仰)’이라 하여 봄·가을에 산악에 제사를 올리는 일을 제도화하였다.

불교 전래 이후 이러한 고유의 산악숭배사상과 습합하면서 전국의 명산과 경관이 빼어난 곳에는 예외없이 절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오대산은 강원도 평창군과 홍천군·강릉시에 걸쳐 있다. 태백산맥의 한 줄기로서 높이 1,563m의 비로봉을 중심으로 호령봉(虎嶺峰상왕봉(象王峰두로봉(頭老峰동대산(東臺山) 등의 고봉들이 있다. 가운데의 중대(中臺)를중심으로 동대·서대·남대·북대가 오목하게 원을 그린 모습이다. 다섯개의 연꽃잎에 싸인 연심(蓮心)같은 산세라 하여 오대산으로 부른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림지대로 동식물상이 다양하고 풍부하다. 월정사로부터 상원사에 이어지는 10㎞의 계곡은 5백년 된 전나무들과 고산식물, 잡목들로 우거진 숲으로 수려하고 웅장한 경관을 자랑한다.

이러한 오대산은 자장이 월정사를 개창한 이래 불교신앙의 성산(})으로 추앙되어 왔다. 중국에서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듣고 귀국한 자장은 오대산에 들어가 다시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7일간 정진하였다. 이를 계기로 오대산은 문수보살의 성지가 되었다.

오대산이라는 이름은 중국 산서성(山西省) 북동부에 있는 청량산(淸凉山)과 관계가 있다. 청량산은 동서남북중의 다섯 봉우리가 누대(樓臺)처럼 되어 있어 오대산이라고도 부른다. 최고봉은 해발 3,058m로서.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불교 성지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으로 알려졌고, (618~907) 초기에는 화엄종의 중심지가 되어 많은 고승들과 사찰이 번성하였다. 이 무렵 중국 전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많은 고승들이 유학을 위해 오대산을 찾았고, 자장도 이곳에 유학하다가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 『광청량전(清涼傳)』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방광불화엄경』 45 「보살주처품」에동북방에 청량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예부터 여러 보살들이 이곳에 머물렀고, 지금도 문수사리 보살이 그 권속으로 보살 1만인과 더불어 함께 그 가운데 상주하면서 설법하고 있다.”고 하였고, 『문수보살현보장다라니경(文殊菩薩現寶藏陀羅尼經)』에는내가 열반에 든 후 이 섬부주 동북방에 한 나라가 있어 이름이 대진나(大振那)이고, 그 가운데 산이 있는데 이름이 오정(五頂)이니라. 문수사리동자가 유력하여 머물면서 여러 중생들을 위하여 그 가운데서 설법하느니라. 또 한량없는 용()과 천(야차(夜叉)와 나찰()과 긴나라(緊那羅)와 마후라가(羅伽)와 인()과 비인(非人) 등이 에워싸고 공양을 올리느니라. 내지는 문수사리에게 이와 같은 한량없는 위신력과 공덕이 있어서 신통변화로 자재롭게 장엄하여 능히 일체의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하여서 원만한 복덕의 힘을 성취하니,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도다.”

 

중국 오대산 문수신앙의 연원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곧 『화엄경』 「보살주처품」과 『문수보살현보장다라니경』에 부처님께서 당신이 열반에 드신후에 동북방 대진나 곧 중국의 오대산에 문수사리보살이 그 권속들을 거느리고 머물면서 일체의 중생들을 위해 가르침을 설할 것이라는 기록이 있고, 따라서 오대산은 경전에 등장한 것과 같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문수사리보살이 1만의 권속을 거느리고 중생들을 위해 설법하고 구제하는 성소(})라는 생각이다.

자장스님은 그러한 중국 오대산의 화엄성지에서 문수사리보살을 친견하고 귀국한 후에, 다시 신라의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신라에도 문수사리보살이 1만 권속을 거느리고 상주하는 도량으로서 오대산 화엄성지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러한 오대산 화엄성지에 자리잡고 있는 월정사(月精寺)는 우리나라의 여러 산중사찰 중에서도 으뜸가는 곳이다. 오대산(五臺山)은 깊고 아늑한 산자락, 침엽수가 하늘에 닿을 듯 울창한 산림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수행자가 아니더라도 이 산에 들어서면 저절로 심신이 맑아지고, 세속의 잡다한 번뇌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하다.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오대산 월정사는나라 안의 명산 중에서도 이곳이 가장 좋은 곳이니 불법(佛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삼국유사』 「대산월정사(臺山月精寺) 오류성중(五類聖}\))라고 하였다.

이 첫 번째 장에서는 오대산의 화엄성지가 형성되는 연원을 살펴본다.

 

1. 자장(慈藏); 월정사의 창건과 오대산 문수신앙의 시작

절은 7세기 중엽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 자장은 신라불교의 위대한 고승이다. 신라의 왕족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이 출가하여 중국 유학을 마친 후, 신라불교의 토대를 마련한 분이다. 『삼국유사』에 월정사의 창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전한다. 『삼국유사』 탑상 제4의 「대산(臺山) 오만진신(五萬眞身), 「명주(溟州) 오대산 보질도태자전기(五臺山 寶叱徒太子傳記), 「대산월정사(臺山月精寺) 오류성중(五類聖}\), 그리고 의해 제5의 「자장정률(慈藏定律)」 등에 월정사의 창건에 관한 이야기가 전한다. 먼저「대산 오만진신」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산중에 있는 고전(古傳)을 상고해 보면 이렇게 말했다. “이 산(오대산)을 진성(眞聖}), 즉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살던 곳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자장법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 법사가 중국 오대산(五臺山)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보고자 하여 신라 선덕왕(善德王) 때인 정관(貞觀) 10(636)에 당나라로 들어갔다. 처음에 중국 태화지(太和池) 가의 돌부처 문수보살이 있는 곳에 이르러 공손히 7일 동안 기도했더니, 꿈에 갑자기 부처가 네 구()의 게()를 주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서도 그 네 구의 글은 기억할 수가 있으나 모두가 범어 (梵語)여서 그 뜻을 전혀 풀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스님 한 분이 붉은 비단에 금색 점이 있는 가사 한 벌과 부처의 바리때 하나와 부처의 머리뼈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의 곁으로 와서는, 어찌해서 수심에 싸여 있는가 하고 물으니 이에 법사는 대답하였다. “꿈에 네 구의 게()를 받았으나 범어로 되어 있어서 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그 글을 번역하여 말했다. “가라파좌낭(呵囉婆佐曩)이란 일체의 법을 깨달았다는 말이요, 달예치구야(㘑哆佉嘢)란 본래의 성품은 가진 바 없다는 말이요, 낭가희가낭(曩伽伽曩)이란 이와 같이 법성(法性)을 해석한다는 말이요, 달예노사나(㘑盧舍)란 노사나불(盧舍那佛)을 곧 본다는 말입니다.” 말을 마치자 자기가 가졌던 가사 등 물건을 법사에게 주면서 부탁했다. “이것은 본사(本師) 석가세존이 쓰시던 도구(道具)이니 그대가 잘 보호해 가지십시오.”

그는 또 말했다.

“그대 본국의 동북방 명주(溟州) 경계에 오대산이 있는데 1만의 문수보살이 항상 그곳에 머물러 있으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법사는 두루 보살의 유적을 찾아보고 본국으로 돌아오려 하는데 태화지(太和池)의 용이 현신(現身)해서 재를 청하자 7일 동안 공양하고나서 법사에게 말하였다. “전일에 게()를 전하던 늙은 스님이 바로 진짜문수보살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또 절을 짓고 탑을 세울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였는데, 이 일은 별전(別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법사는 정관(貞觀) 17(643)에 이 강원도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보려 했으나 3일 동안이나 날이 어둡고 그늘져서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가 다시 원령사(元寧寺)에 살면서 비로소 문수보살을 뵈었다. 뒤에 칡덩굴이 서려 있는 곳으로 갔는데, 지금의 정암사(淨岩寺)가 바로 이곳이다(이것도 역시 별전에 실려 있다).

그 후 두타(頭陀) 신의(信義)는 범일대사(梵日大師)의 제자로서 이 산을 찾아 자장법사가 쉬던 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의가 죽은 후에는 암자도 역시 오랫동안 허물어져 있었는데, 수다사(水多寺)의 장로(長老) 유연(有緣)이 새로 암자를 짓고 살았으니, 지금의 월정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월정사는 643(선덕여왕 12) 자장이 오대산에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자장은 절을 세운 것은 아니었고, 문수보살을 만나기 위해 허름한 움막을 지었던 것이다. 이후 범일의 제자였던 신의가 자장이 머물던 곳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비로소 절이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이 「대산 오만진신」조는 적어도 두 가지의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곧 자장은 오대산 부근에 문수신앙과 관련하여 월정사, 석남원(石南院, 현 정암사), 수다사(水多寺)를 창건하였고, 그의 오대산과의 인연은 문수신앙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사실을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려 말 민지(閔漬)가 지은 「봉안사리개건사암제일조사전기(奉安舍利開建寺庵第一祖師傳記)」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후에 명주(현 강릉 지역) 오대산을 찾아가 지로봉(地爐峰)을 올라 부처님의 두뇌사리와 정골사리를 봉안하고 가라허(伽羅墟)에 비석을 세웠다.(비석은 땅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그 사적을 기록하고 이어서 월정사를 창건하고 13층 석탑을 세워 사리 37매를 탑심(塔心)에 봉안하였다.(전래하는 말에 의하면 우파국다優婆國多 사리탑이라 하지만 이는 잘못 전해진 말이다. 이 말은 원효대사가 지은 전기에서 나왔다.)

일설에 의하면, 선사가 귀국하면서 인도스님이 전해 준 부처님의 가사, 부처님의 바리대, 부처님의 뇌골사리 등은 황룡사에 봉안하고 그 절에 머물면서 공양하다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얼마 후 명주 오대산을 찾아가 월정사 터에 이르러 임시 초막을 세워 3일 동안 머물렀다. 이때 온 산이 음침하여 날이 개이지 않으므로 산의 모습을 살필 수 없었다. 떠나간 후에 다시 그곳을 찾아와 여덟 자의 방을 창건하고 7일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위 부분은 오대산 본전기에서 나왔음.)

큰 소나무 아래 우물을 파니(오늘날의 한송정寒松汀 바로 그곳이다.) 한 거사가 갑자기 현신하여 조사와 오랫동안 청담(淸談)을 나누다가 말하였다.

“스님은 지난날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 말을 마치고 곧 사라져 버렸다. 조사는 이에 스스로 자신을 꾸짖었다.

“거사는 지난 날 오대산에서 현신하였던 인도스님이다.”

조사는 공중을 향하여 예배를 올리고 곧 태백산을 향하여 칡넝쿨이 얽혀있는 곳을 찾아가니,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나무 아래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곳은 문수보살께서 가르쳐 준 곳이다.”

시자에게 말하고서 곧 계를 주고는 산 아래로 구렁이를 옮겨 주고 암자를 창건하여 그곳을 살나암(薩那庵)이라 하였다.(오늘날의 부암사[浮岩寺]가 바로 그곳이다.) 그 암자를 따라 남쪽으로 1천 보 거리에 신선동(神仙洞)이 있다. 또 다시 암자를 창건하여 상살라암(上薩那庵)이라 하였다.

조사는 두 암자를 왕래하면서 문수보살의 친견을 기다렸는데, 어느 날 비승비속의 한 노거사가 떨어진 가사를 걸쳐 입고 칡넝쿨로 짠 삼태기에 죽은 개 한 마리를 담아 가지고 찾아와 시자에게 말하였다.

“자장스님을 찾아보러 왔노라.”

시자는 노거사가 조사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 하여 성내며 지팡이를 들어 내쫓으려고 하자, 거사가 말하였다.

“너의 스님에게 말을 전하고 떠나갈 것이다.”

시자가 들어가 조사에게 고하니미친 사람인데 어째서 쫓아내지 않느냐고 하였다.

시자가 나와 말을 전하고 내쫓으니 거사가 말하였다.

“돌아가야지! 이제는 돌아가야겠다.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떻게 나를 볼 수 있겠는가.”

말을 마치고 삼태기에 담긴 개를 땅바닥에 떨어뜨리자, 사자법좌로 변하였다. 그 법좌에 앉아 눈부신 광명을 쏟아내며 허공을 타고 떠나갔다. 시자가 들어와 조사에게 고하자, 조사는 법복을 갖추고서 그 방광을 바라보니, 허공을 날아 남쪽 산등성이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선사는 열반한 후에 그곳에서 다비를 하고 돌무더기에 사리를 안치하였다.

 

“대산을 찾아가 지로봉(地爐峰)을 올라 부처님의 두뇌사리와 정골사리를 봉안하고 가라허(伽羅墟)에 비석을 세웠다.(비석은 땅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그 사적을 기록하고 이어서 월정사를 창건하고 13층 석탑을 세워 사리 37매를 탑심(塔心)에 봉안하였다.”는 민지의 이 기록은, 적어도 13세기경에는 자장을 월정사의 창건조사로 보는 인식이 뚜렷하였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이 기록에는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얼마 후 명주 오대산을 찾아가 월정사의 터에 이르러 임시 초막을 세워 3일 동안 머물렀다. 이때 온 산이 음침하여 날이 개이지 않음으로 산의 모습을 살필 수 없었다. 떠나간 후에 다시 그곳을 찾아와 여덟 자의 방을 창건하고 7일 동안 머물렀다”는 오대산 본전의 기록도 함께 인용하고 있는데, 이 기록은 사탑을 건립하였다는 기록과 서로 어긋난다.

그러나 적어도 오대산 문수신앙의 시작이, 그리고 월정사의 최초 개산(開山)이 자장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이 두 기록이 명료하게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다만 자장의 오대산 및 월정사와의 인연은 오대산 문수신앙의 직접적인 연원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곧장 월정사 대가람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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