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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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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14-02-03 17:12 조회4,2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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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 - 5

[1894 vs 2014, 갑오년의 동아시아](5) 청일전쟁, 대륙으로 확산

ㆍ일본군에 2만명 학살당한 ‘뤼순’… 중국의 병참기지가 되었다

■ 전쟁의 전략과 무대가 바뀌다

1894년 9월16일 일본군 제1군은 평양전투에서 리훙장(李鴻章)이 지휘하는 북양육군에 승리하자 즉각 만주를 향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청의 수도인 베이징(北京)을 점령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그 이튿날 일본해군은 황해해전에서 승리했다. 북양해군 소속 12척의 주력 함정 가운데 5척을 격침시킬 정도의 승리였다. 범선 시대의 전법을 구사하던 북양해군과 달리, 세로로 일직선을 이루어 고속으로 전진하며 포격전을 통해 예상 밖의 완승을 거둔 결과였다.

리훙장은 전쟁 전략을 바꾸자고 황제에게 곧바로 상주문을 제출했다. 그는 청일전쟁을 북양해군과 북양육군만의 전쟁이 아니라 국가의 전쟁으로 격상하고, 지구전에 돌입할 것을 제안했다. 지구전 속에서 열강의 개입을 기다려 강화조약을 체결하겠다는 전략인 것이다.



< 다롄시 바이위산(白玉山)에서 본 뤼순항. 포대가 있는 황진산(黃金山)과 호랑이 꼬리를 연상시키는 후웨이(虎尾)반도 사이의 물길이 유일한 출입구다. 출입구의 수로는 폭 200m, 깊이 10m 정도 된다. 사진의 오른쪽에 중국 북해함대 기지인 서항이 있다. >

청이 전쟁 전략을 바꾸었을 때 일본군은 여전히 단기전을 꿈꾸고 있었다. 15만명을 7개 사단에 편성하고 있던 일본 육군은 단기 결전으로 베이징을 노렸다. 단기전이란 노림수는 이미 황해해전에서부터 빗나갔다. 장갑포를 탑재한 북양해군의 주력 함정을 포함해 7척을 격침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뤼순(旅順)과 산둥(山東)반도의 웨이하이웨이(威海衛)에 기지를 둔 북양해군이 있는 한 황해를 통한 수송이 원활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다.

일본은 즉각 제2군을 편성하고 10월24일부터 랴오둥(遼東)반도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반도의 끝자락에 있는 다롄(大連)을 11월7일에 점령했다. 뤼순을 고립시킨 것이다. 이어 11월21일에 뤼순도 점령했다. 뤼순과 북양해군의 기지를 일본이 장악했다는 의미는 다른 전투와 비교해도 남달랐다. 일본으로서는 북양해군의 두 거점 가운데 한 곳을 차지함으로써 청의 해군력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 중국인 사이에 베이징과 톈진(天津)의 관문이라 불리던 뤼순을 점령함으로써 청일전쟁의 확실한 승기도 잡을 수 있었다. 조선에서 청을 확실히 배제하고 독자적인 영향력을 안정적으로 행사하겠다는 전쟁의 기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도 잡았다. 일본군이 전투와 무관한 곳까지 샅샅이 뒤져 동학농민군을 일부러 학살하며 제압해 갔던 것도 이즈음부터였다.

그런데 일본군은 10명 중 2, 3명이 동상에 걸릴 정도로 매서운 만주 날씨와 싸워야 했다. 긴 수송로 때문에 본토로부터 보급도 원활하지 못하여 굶어 죽는 자도 생겨났다. 더구나 11월부터 미국과 영국, 러시아가 청일 양측을 중재하겠다며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리훙장의 지구전 전략이 먹히는 듯했다.

일본으로서는 전쟁전략을 다시 짤 수밖에 없었다. 베이징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혹시라도 청 정부가 무너지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핵심 문제였다. 만약 청 정부가 무너지면 열강이 전쟁에 개입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본은 전과를 독점할 수 없다. 조선을 둘러싼 청과의 경쟁에서도 종지부를 찍지 못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총리는 12월4일에 웨이하이웨이에 있는 북양해군 기지를 파괴하고 대만을 공략하자고 대본영에 제안했다. 웨이하이웨이를 점령하여 청 정부에 종전 협상을 압박하고, 대만을 할양받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대만을 차지하면 북쪽을 지키고 남쪽을 공략한다는 국가 전략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일본의 여론도 대만을 점령하지 않고 전쟁을 끝내면 백 년의 유감이자 천추의 실책이라며 지지했다. 일본사회가 조선을 차지하는데 만족하지 못하고 동아시아로까지 눈을 돌린 것이다.

뤼순을 점령한 제2군은 새로운 전략에 따라 1895년 2월 웨이하이웨이의 기지를 파괴하였다. 북양함대의 괴멸과 함께 리훙장도 정치적으로 몰락하였다. 3월에는 대만을 차지하기 위한 교두보로 펑후다오(澎湖島)를 점령하였다.

< 황해해전을 그린 만화. 일본은 황해해전에서 청의 북양함대를 물리쳐 청일전쟁의 승세를 굳혔다. >

■ 뤼순을 차지한 자, 동북아를 호령했다

뤼순은 만주로 진출하는 동시에 중국 본토로 진격을 준비할 수 있는 지리적 위치에 있었다. 발해를 장악하면서 동시에 황해를 통제할 수 있는 곳이 뤼순이었다. 그것은 조선의 북서해안에까지도 즉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일본은 뤼순 점령으로 새로운 전쟁전략을 펼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지만, 청은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청만이 아니었다. 동북아에서 얼지 않는 항구를 확보하고자 남하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러시아에도 곤혹스러운 결과였다. 러시아가 삼국간섭을 주도하여 1895년 4월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된 지 6일 만에 일본으로 하여금 랴오둥반도를 청에 돌려주도록 한 것만 봐도 뤼순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두 나라는 그로부터 10년 후인 1904년에 뤼순을 둘러싸고 8개월 동안 치열하게 싸웠다. 1905년 1월 뤼순 공방전에 참가한 연인원 13만명의 일본군 가운데 70%가 손해를 볼 정도였다. 전사자만 1만5000여명, 부상자도 4만3000여명이나 되었다. 승리한 일본은 뤼순에 만주 침략의 최전방 지휘부로 관동도독부와 관동군사령부를 설치했다. 관동군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감행하자 1927~28년에 산둥반도를 두 차례나 침략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1931년 만주침략을 주도했다.

러시아는 후일 러일전쟁을 기록하며 일본이 뤼순을 점령함으로써 이미 절반을 승리했으며, 미국과 영국 등으로부터 많은 재정지원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실제 일본은 러일전쟁 당시 육지에서의 싸움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도 중요한 전투’인 봉천전투에 집중할 수 있었고, 전체 전쟁 비용 15억엔 가운데 7억엔을 미국과 영국에 채권을 팔아 충당했다.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조차 일본은 뤼순 점령으로 조선, 중국, 만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거점을 획득했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그런지 소련군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끝나고 1945년 8월22일 다시 뤼순에 진주했고 1955년까지 주둔했다. 중국인민해방군도 뤼순의 문을 꼭 닫았다가 개혁개방이 시작된 지 18년 만인 1996년에 와서야 ‘부분적’으로 개방할 정도였다.

이처럼 정치 군사적 요충지인 뤼순의 가치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리훙장이었다. 그는 1881년 10월 뤼순의 바이위산(白玉山)에 올라 ‘뤼순은 북양의 요새에 위치하고 경기(京畿)의 문호(門戶)’라며 이곳에 해군기지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필자도 지난 14일 바이위산에 올랐을 때 뤼순을 가리켜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만 사람이 와도 이를 열 수 없다’(一夫當關 萬夫莫開)고 말하는 이유를 바로 깨달았다. 넓고 깊으며 얼지 않는 항구. 그 앞을 절벽처럼 가로막고 있는 후웨이반도. 그것은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다.

청은 뤼순 해군기지를 1890년에 완성했다. 항구 주위에 10개의 포대를 설치했고, 군함을 수리하고 점검하는 공장도 지었다. 당시 뤼순은 세계 5대 군항의 하나였다. 러시아도 1898년부터 6만여명의 중국인을 동원하여 130여개의 방어진지를 구축함으로써 자국에서 가장 큰 진지보다 여섯 배나 규모 있게 뤼순을 탈바꿈시켰다.

오늘날에도 중화인민공화국 북해함대의 세 기지 가운데 한 곳이 뤼순에 있다. 북해함대는 중국의 3대 함대 가운데 하나로 동북아 군사외교 정세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첫 항공모함 랴오닝호가 소속된 함대이다. 또 뤼순에는 군함을 건조하고 수리하는 ‘중국인민해방군 4810공장’인 랴오난(遼南)조선소도 있다. 한편으로 중국의 개혁개방이 지속되면서 뤼순의 경제적 가치도 높아지고 있다. 동북삼성의 대외무역 통로인 다롄시에 포함되면서 시내에서 뤼순까지 가는 길에 세계적 전자업체들이 즐비하게 진출해 있을 정도다.

<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학살된 중국인 2만여명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뤼순만충묘기념관. 청일전쟁 100주년인 1994년에 개관했다. >

■ 또 하나의 전쟁터, 조선 남부지방

뤼순을 점령한 일본군은 그냥 있지 않았다. 4일 동안 뤼순과 그 일대의 민간인, 포로 등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뤼순학살로 2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말한다.

민간인과 포로를 대량으로 학살하는 행위는 일본군의 특징이다. 동학농민군 섬멸작전은 그 첫 행동이었다. 농민군은 9월부터 각지에서 다시 봉기했다. 평양전투 이후에도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일본의 입장에서 청일전쟁의 후방이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병참선과 군용전선의 문제보다 더 확장된 관점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청일전쟁을 동시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중·일 3국의 역사교과서 가운데 이러한 관점에서 청일전쟁의 양상을 기술한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기에 청일전쟁에서 가장 많은 전사자가 나온 곳이 일본과 청이 아니라 3만에서 5만여명이 죽임을 당한 조선이었다는 점을 주목하지도 않는다. 이는 일본의 전쟁인식에 동조하는 태도로 비춰질 수도 있다.

일본은 재기한 농민군을 진압하고자 후비 보병 제19대대를 특별히 편성하고 11월부터 작전에 투입하였다. 제19대대의 작전 목적은 농민군의 북쪽 이동을 저지하여 러시아가 전쟁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또 농민군을 “격파하고 그 화근을 초멸(剿滅)함으로써” “다시 일어나는 후환을 남기지 않도록” 하는 데도 있었다. 조선의 정부군도 일본군의 지휘를 받았다.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한 위정자가 외세에 의존하여 백성을 탄압하며 권력을 유지하는 일은 역사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현상이다.

우금치전투에서 승리한 제19대대는 12월 들어 새로운 작전을 짰다. 전라북도 북부에서 전주, 무주, 경상남도 거창까지 동서로 커다란 포위망을 만들고, 그 안에 있는 농민군을 전라도 서남해안의 장흥, 해남으로 몰아가며 학살하겠다는 작전이었다. 남해안의 섬으로 숨어드는 농민군을 색출하기 위해 두 척의 군함도 배치했다. 이는 1909년 9월과 10월 ‘남한대토벌작전’ 때도 호남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써먹은 작전이었다.

특히 제19대대는 1895년 1월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는 장흥전투 이후 되도록 많은 농민군을 죽였다. 해남에서는 군조(軍曹)의 명령에 따라 착검한 병사들이 7명의 농민군 포로를 일렬로 세우고 일제히 찔러 죽였다는 일본군 병사의 기록도 있다. 1937년의 중일전쟁 때 명령과 동시에 포로를 총검으로 일제히 찔러 죽이는 반인륜적 행위들보다 훨씬 먼저였던 것이다.

농민군의 저항과 제19대대의 학살은 1895년 4월까지 계속되었다. 그때까지 전투 중 일본군 사망자는 1명, 질병과 부상 등으로 사망한 군인이 36명이었다. 일본은 조선인 양민을 학살한 이들을 포함해 침략군인 모두를 야스쿠니신사에 모시고 있다. 야스쿠니신사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해법의 하나로 일본에서 제기되고 있는 ‘A급 전범 분사론’에 한국이 동의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 지난 1월22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연차총회 때 일본의 아베 총리가 ‘나라를 위해 소중한 목숨을 희생한 영령들의 명복’을 비는 곳이 야스쿠니신사라고 말한 억지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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