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사 역사와문화]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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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14-02-11 14:15 조회4,149회 댓글0건본문
Ⅳ. 근대 이후: 전통을 품은
선(禪)과 화엄의 새로운 산실
근대는 전면적이고 또한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근대화를 기점으로 조선 불교는
시대의 변화를 맞이한다. 그러나 그 변화는 내부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 외부로부터 강제적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변화를 맞이 했다기보다는 변화에 휩쓸렸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특히 그 변화는 외세에 의한 국권의 상실이라는 수난과 치욕의 역사였고, 그
격랑 속에서 조선불교는 전통과 근대의 사이를 뛰어넘어야 했다.
오대산 월정사라고 해서 그 변화의 거센 물결로부터 예외일 수 없었다.
1902년 국가에서 불교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원흥사(元興寺)를 창설하였고, 실무
관리부서로서 사사관리서를 두었다. 사사관리서에서 국내사찰현행세칙이라는 시행규칙을 제정하여 구체적인 불교의
통합, 관리방안을 마련하였다. 모두 36조의 세칙을 통해 당시 불교의 위상과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 먼저
한국불교를 통불교로 파악하고, 불교는 출세간의 도피적 종교가 아니라 정법을 따르며 수행을 통해 대중을
교화한다고 하였다.
세칙은 승려의 법계를 3단으로 구분하고 각각에 맞는 자격과 가사 착용을 규정하였다. 또한 본산제도를 제정하여 전국을 16본산 체제로 정비하였다. 원흥사를 대법산으로 하고, 16개의 중법산을 두었다.
이때 강원도의 중법산으로 유점사와 월정사가 선정되었다.
월정사는 강원도의 수사찰(首寺刹)이
되었다. 수사찰이란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가
제정한 16개의 중법산(中法山)을
말한다.
한편 세칙에는 사원경제를 국가가 직접 관여하기 위해 사찰의 전답과 산림을 파악하고, 전각의
규모, 불상과 탑의 수 등을 보고할 것을 규정하였다. 일본불교의
침투가 성행하여 한국불교를 병합하려는 의도가 노골화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1904년 불과 2년 만에 사사관리서는 폐지되어 중법산제도는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유명무실해진 제도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조선사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불교를 제도적으로 포섭해내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제도의 시행 자체가 불교 역시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예외일 수 없는 존재였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시대적 격랑 속에서 조선시대 동안 면면히 이어온 오대산 불교는 강원도 불교를 대표하는 존재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월정사는 근대시기에 들어 강원도를 대표하는 사찰이 되었고, 1911년 일제강점기에는 전국 31본산 가운데 하나가 되어 강원도
남부의 사찰을 총괄하였다.
그리고 격랑으로 점철되었던 일제강점기, 오대산과 월정사는 내외로 한 암중원과
지암종욱이란 걸출한 납자를 만나게 된다. 한암중원은 근대 한국불교 선맥의 큰 산맥인 경허 성우의 법을
전승하면서 보조의 정혜결사를 되살려 한국불교의 전통과 정체성을 되살리고자 한 본래면목의 선사라 할 수 있다. 반면
지암종욱은 그러한 한암중원을 오대산의 조실 스님으로 나아가 한국불교의 큰스님으로 모시고 근대의 부침기를 꿰뚫은 오대산과 한국불교의 외호자로서의
역할을 자임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한암중원을 계승하는 탄허택성과 만화희찬을 거치면서 오대산불교는 근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또 다른 전통의 산실로 거듭나게 된다.
탄허택성은 스승인 한암중원의 가르침을 계승하면서 오대산에 화엄선의 세계를 오롯이 되살려낸 선사이자 대강백이자 화엄행자였다. 그리고 그러한 스승 탄허택성을 모시고 한국전쟁기에 전소되다시피 한 오대산 월정사를 다시 온전한 수행공간과 교육공간으로
재건하고자 불사의 한 길을 걸었던 만화희찬은 스승과 함께 현대 오대산 불교를 지탱해온 또 다른 버팀 목이었다.
1. 전통과 근대, 선맥(禪脈)의 전승- 한암중원
1) 경허와 한암
구한말부터 국권상실기에 이르는 시기는 조선의 승려들에게 미묘한 시기였다. 한편으로는
시대의 수레바퀴에 채여서 어디로 굴러갈지 모르는 왕조의 풍전등화 같은 운명이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면서 민중으로서의 삶이 위협당하는 암울한 시기였고, 한편으로는 5백 년 동안 굳어져 있던 억불(抑佛)의 굴레에서 벗어날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한 시대에, 경허는 불교계의 지식인이기는 했으되 조선의 선도그룹일
수는 없었다. 그만큼 조선사회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위치란 미미한것이었다. 아직도 희망을 발견하기란 조선의 승려에게는 요원한 일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구한말은 물론 국권상실기에 활동하였던 대부분의 조선 승려들의 삶대부분은 조선불교의 실력 쌓기에 치중되어 있었다. 그들 대부분에게 있어 조선불교는 주어진 그리고 선택한 길이었으나, 조선불교의
행방에 대해서는 제각각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의 한국불교는 일본의 압제 하에서 질곡을 겪었다. 유구한 불교전통과 신앙, 문화 등이 왜색불교로 변질되거나 말살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월정사를 굳건하게 지키고, 우리 불교의 정통성을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하신 분이 한암중원(漢巖重遠, 1876~1951)선사이다. 스님은 1925년 오대산 상원사에 들어와 입적하던 1951년까지 27년간 산문 밖을 거의 나가지 않았던 근현대 오대산
불교의 산 증인이었다.
한암중원(漢巖重遠, 1876~1951) 스님을 말할 때 근대 한국불교의
큰 산맥인 경허 스님을 빼놓을 수 없듯이, 경허 스님을 말할 때 경허 스님이 지음이라 칭했던 한암 스님을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구한말에 활동한 인물인 경허성우(鏡虛惺牛, 1846-1912)63)63 스님은 근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스님은 당대의 걸출한
선객들을 길러내어 근현대 한국불교에 선 전통을 부흥시킨 인물로, 그리고 특이한 행적으로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분이다. 경허 스님은 오도(1879년경) 후 20여 년간 호서지방에 불법을 폈다. 천장암을 비롯하여 수덕사, 개심사,
문수사, 마곡사, 태고사, 갑사, 법주사 등을 돌며 선풍(禪風)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또 1898년 부산 범어사에 영남 최초의
선원을 개설하고 납자들을 지도했다. 이듬해인 1899년에는
가야산 해인사 조실로 추대됐다. 또한 화엄사, 송광사, 천은사, 백장암, 태안사
등 호남을 유력(遊歷)하며 선원을 개설하고 수좌들의 발심을 도왔다. 1903년 스님은 국한문 혼용으로 ‘참선곡’ ‘가가가음’을 지었다. 또한 순 한글로 ‘법문곡’과 ‘중 노릇 잘하는 법’을 지어
누구든 안목을 열 수 있도록 했다.
1904년 경허 스님은
천장암을 거쳐 북녘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대산 월정사와 금강산을 거친 스님은 안변 석왕사에 잠시 머문 뒤 자취를 감췄다. 박난주(朴蘭洲)라는 이름으로 머리를
기르고, 승복조차 벗어버린 경허스님은 유생의 모습으로 저자에 들어갔다. 마치 심우도(尋牛圖)의 마지막 단계인
입전수수(入廛垂手)와 같은 삶을 보여
주었다. 독립운동가인 김탁 집에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조선의 미래를 기약했다. 경허 스님은 1912년 4월 25일 갑산 웅이방도하동
서재에서 입적했다.
하지만 경허의 선풍은 근대 이후의 한국불교를 뒤덮었다고 표현해도 부족함이 있을 정도이다.
「선사 경허화상 행장(先師鏡 虛和尙行狀)」에서 한암 스님은 경허 스님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으니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네 (四顧無人)」
이 사고무인(四顧無人) 네 글자를 첫머리에도 두고 또 끝에서도 맺어놓은 것은, 이것은 사우(師友)와 연원(淵源)이 이미 끊어져서 서로 인증(印證)하여 전해줄 곳이 없음을 깊이 탄식한 것이다. 일찍이 대중들에게 이르기를,
“무릇 조종(祖宗) 문하에서 마음법을 전수함에 표본이 있고 증거가 있으니 이를 잘못되게 해서는 안 된다. 예전에 황벽은 마조가 백장에게 ‘할’을 한 소식을 듣고 도를 깨달아 백장의 법을 이었고, 흥화는 대각의 방망이 아래서 임제의 방망이 맞던 소식을 깨달아 임제가 입멸한 뒤지만 임제의 법을 이었고, 우리 동국에는 벽계64가 중국에 들어가 법을 총통에게 얻어와서 멀리 구곡을 계승하였고, 진묵65은 부처님의 화신인 성인으로서 서산이 입멸한 후에 법을 이었으니, 그 스승과 제자가 서로 계승함이 이와 같이 엄밀한 것은, 대개 마음으로써 마음을 인가(印可)하여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인증 (印證)했기 때문이다. 오호라! 성현이 오신 지 오래되어 그 도가 이미 폐하였으나 그러나 간혹 본색납자(本色衲子)가 일어나 살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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