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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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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14-02-10 15:08 조회4,2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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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 vs 2014, 갑오년의 동아시아]

(6) 1895년 4월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ㆍ일본, 조선과 동아시아 패권을 빼앗다

일본 혼슈의 최남단 시모노세키. 시모노세키는 도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이었다. 조선의 통신사도, 식민지 시기 조선의 젊은이들도 부산을 떠나 시모노세키를 통해 일본에 들어갔다. 지금은 과거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시모노세키 국제항은 식민지 시기 일본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그의 문학에서건 자서전에서건 여행기에서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 1895년 3월19일 청의 전권대신 리훙장(李鴻章)이 도착했다. 그 후 한 달간 이곳에서 동아시아를 뒤흔든 회의가 개최되었다. 해협을 가로지르는 간몬대교 인근에 있는 슌반로우(春帆樓)라는 요정이 회담장이었으며, 리훙장은 그곳에서 ‘리훙장의 길’을 따라 300여m를 가면 나타나는 인조지(引接寺)에 여장을 풀었다. 시모노세키는 당시 혼슈에 있었던 일본 해군 함정이 대륙을 향할 때 지나는 곳으로 리훙장에게 무력시위를 하기 좋은 장소였다.

일본의 대표는 조슈번 출신의 이토 히로부미였다. 리훙장과 이토가 1885년 톈진에서 조약을 체결할 때 만난 지 10년 만에 다시 조우했다. 1895년은 1885년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이토는 고향 땅에서 위풍당당하게 일본을 제국으로 올려놓을 절호의 기회를 잡고 있었다.

리훙장과의 만남에서 이토는 10년 전 절치부심했던 자신의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1885년 톈진에서 협상이 안되면 싸우자고 했던 리훙장의 위풍당당함은 어디에 갔습니까? 개혁을 하지 않으면 일본에 따라잡힐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리훙장은 시모노세키에 오기 15년 전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1879년 류큐(지금의 오키나와) 문제를 둘러싼 협상에서 전 미국 대통령 그랜트가 제시했던 류큐 분할안을 무시하고 일본과 협상에 나서지 않았다가 일본의 류큐 점령을 묵인하게 되었다. 후에 량치차오(梁啓超)가 리훙장에 대해 시세를 전혀 몰랐던 인물이라고 비판했던 것도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리훙장은 1885년 톈진에서도 쿠데타 지원에 실패해 쫓기는 신세였던 일본에 면죄부를 주고 오히려 조선에서 일본의 위치를 청과 대등한 관계로 만들어주었다.

회담이 시작된 지 이틀 후인 3월23일 일본의 보병 1개 여단이 대만 서쪽의 펑후제도(澎湖諸島)에 상륙했다. 전쟁의 성과물로 대만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1874년에 이루지 못했던 대만 점령의 꿈을 이루기 위한 치밀한 전략이었다.

이토의 기세는 이튿날인 3월24일 회담장에서 숙소로 돌아가던 리훙장이 테러를 당하면서 조금은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4월8일 부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한 리훙장이 회담장에 나오면서 협상은 급진전되어 4월17일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이 제시한 3억량의 배상금이 2억량으로 감소한 것 외에는 일본의 요구 조건이 대부분 반영된 조약안이었다.

< 시모노세키 조약의 일본 측 두 주역 이토 히로부미(왼쪽)와 무쓰 무네미쓰의 흉상. >

▲ 일본, 청에 강화도조약 인정 강요… 조선 병합 의지 재확인

대만·류큐·댜오위다오 점령으로 중·일 영토분쟁 ‘씨앗’ 심어

동아시아 민족·국가주의 등장… 최근 중·일 대치 정세와 닮아

■ 일본의 목표는 조선과 대만

시모노세키 조약은 일본과 청이 참여한 양국 간 조약이었지만, 그 1항은 조선에 대한 문제였다. 1876년 조선이 개항할 때 강화도조약의 1항에 있었던 내용이 그대로 반복되었다. 즉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내용이었다. 시모노세키 조약 1항과의 차이라고 한다면 ‘청국이 그것을 확인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시모노세키 조약의 본질적 성격이 드러난다. 이제 청국이 스스로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포기한 것이다.

청은 시모노세키 조약의 1항으로 인해 1000년을 넘게 중국이 누려온 동아시아에서 패권국의 지위를 일본에 넘겨주었다. 서구 열강의 세력 확장으로 인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청은 조선이 서구와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써 서구로 하여금 일본의 조선에 대한 손길을 막으려 했지만, 러시아와 영국, 오스트리아와 오스만튀르크가 얽힌 유럽 대륙에서의 전쟁에 바쁜 서구 제국들이 조선의 독립을 지켜줄 여력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국군을 끌어들였던 조선 정부도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다.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 후 개화파들은 조약의 1항에 있는 ‘자주국’ 규정에 눈이 멀었고, 영은문을 없애고 독립문을 세웠다. 백성들의 돈을 모아 세운 독립문의 현판은 이완용이 썼으며, 준공식에는 독립협회 회원들뿐만 아니라 백조대관이 참석했다.

조약의 2조와 3조를 통해 대만에 대한 주권을 이양받은 일본은 이제 북쪽으로뿐만 아니라 남쪽으로도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류큐를 점령한 상태에서 대만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그 사이에 있는 댜오위다오를 일본의 센카쿠로 개명하였다. 중·일 영토분쟁의 출발점이었다. 일본에서 100만부 이상 팔린 <근대사연표> 책에서는 이 시점에서 일본이 드디어 대만에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숙원을 이룬 것처럼 표제를 뽑았다.

물론 일본은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의 소위 ‘3국 간섭’으로 인해서 조약의 2조와 3조에 규정된 랴오둥(遼東)반도 할양을 포기해야 했다. 랴오둥에서 일본의 권리가 박탈되자마자 러시아는 곧바로 하얼빈에서 아서항(Port Arthur·지금의 뤼순)까지 철도 건설을 시작했다. 일본으로서는 개항 직후에 서구 제국과 맺었던 불평등 조약의 수치가 3국 간섭으로 이어졌고, 10년 후 러일전쟁을 예고했다.

< 1895년 4월17일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장소에 세워진 ‘일청강화기념관’에는 조약 협상 테이블이 복원 전시돼 있다. 원래의 조약 체결장이었던 요정집 반로우는 2차 대전 때 폭격으로 사라졌다. >

■ 동아시아 3국의 부침

시모노세키 조약은 120년 전 동아시아 국제관계가 일본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초석이 되었다. 조약이 조인된 후 1년이 지나 다시 대만으로 가기 위해 시모노세키를 방문한 이토는 ‘향후 100년간 양국(일본과 중국) 관계’에 대한 글귀를 남겼다. 지금도 시모노세키에 있는 청일전쟁 기념관에 있는 이 글귀를 통해 이토는 시모노세키 조약으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패권이 향후 100년 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았던 것인가?

이토의 예상과 달리 일본의 상승세와 동아시아에서의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의 세력 확장은 정당한 것이 아니었으며, 주변국의 국민들뿐만 아니라 다른 열강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일본은 서양으로부터 아시아를 지켜준다는 ‘대동아공영권’의 명분하에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전쟁을 일으켰지만, 어떠한 미사여구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팽창 야욕을 가리지는 못했다.

1943년의 카이로 회담에서 루스벨트, 처칠, 그리고 장제스가 모여 시모노세키 조약으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모든 권리를 박탈할 것을 선언했다. 시모노세키 조약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 조약을 일본의 ‘탐욕(greed)’의 결과로 규정했다. 그리고 1945년 일반명령 1호를 통해 일본의 네 개 주요 섬을 제외한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모든 지역을 원래의 주권 상태로 되돌렸다. 이러한 내용은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조약에도 그대로 포함되었다.

전범 국가인 일본은 연합국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고, 시모노세키 조약은 그 조인으로부터 57년이 지난 1952년 4월28일 일본과 대만 사이의 ‘타이베이 조약’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무효화되었다. 그러나 냉전은 일본에 면죄부를 주었다.

일본의 대외적 팽창을 추진해서 다른 아시아 국가뿐만 아니라 일본 자체에도 엄청난 피해를 주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 후예들은 냉전을 이용해서 과거의 영예를 놓지 않으려 하였다.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한국과 중국이 초청받지 못했고, 조약에는 독도와 댜오위다오를 명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제국화를 추진하면서 그 주변부를 짓밟았던 사람들의 위패를 야스쿠니신사로 옮겨 이들을 다시 추앙하고 있다.

이토가 이야기한 시모노세키 후 100년간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는 처음에는 군국주의 일본에 의해, 나중에는 미국의 후원하에 냉전체제를 통해 규정되었고, 지금은 그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부터 120년이 지난 지금 세계는 새로운 시점에 서 있다. 조약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중국은 리훙장 시대 이전 동아시아의 패권을 다시 회복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끝까지 시모노세키 조약 체제를 놓지 않으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청과 일본이 조선을 놓고 겨루고 있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우리의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 청의 전권대신 리훙장이 시모노세키 조약 협상장과 숙소를 오가며 걸었던 ‘리훙장의 길’. >

■ 배타적 민족주의 대두

시모노세키 회담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리훙장이 이토에게 했던 말처럼 청일전쟁을 통해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는 점이다.

잠에서 깬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맞닥뜨린 동아시아 3국은 눈앞에 있는 새로운 미래에 대응하기 위해 사회적 개혁을 추진했다. 일본의 개혁에 비하여 중국과 한국의 개혁은 결코 성공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이 과정에서 한·중·일에서 강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등장했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는 공존을 위한 사상이 아니었다. 나의 생존을 위해 상대를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규정했다. 적대적 인식은 19세기 말, 20세기 전반기를 통해 제국주의 팽창과 민족해방운동의 동력이 되었다. 지금 탈냉전 시대에 다시금 배타적 민족주의·국가주의가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리훙장의 북양함대 사령부가 있었던 중국 웨이하이에도 시모노세키와 마찬가지로 청일전쟁 기념관이 있다. 시모노세키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대규모이다. 일본이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만들었다면,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하는 시기에 청일전쟁 기념관을 세웠다. 그리고 이 기념관에는 중국 근대 개혁의 선구자였던 량치차오가 청일전쟁을 ‘중국 민족주의의 시발점’이라고 규정했다는 사실을 기념하고 있다.

120년 전의 시모노세키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지 못했던 과거의 역사도 문제였지만,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책임을 묻지 못했고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한 현재의 상황이 더 큰 문제다. 그리고 배타적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는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120년이 지난 지금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고 대응하고 있는가?

< 일본 시모노세키 가이쿄 유메타워의 ‘부산 방향’ 표지. 시모노세키는 오랫동안 한·일 교류의 중요한 지역이 되어왔다. >

■ 역설의 장소 시모노세키

지난 120년간 시모노세키는 역설적인 장소였다. 간몬해협을 사이에 두고 규슈를 마주보고 있는 시모노세키는 조슈번이 장악하고 있었던 곳으로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모토하에 서양을 배척하기 위해 전투를 벌인 곳이었으며, 동시에 일본이 서양을 따라 제국이 되기 위해 조약을 체결한 곳이었다.

존왕양이의 전쟁을 위해 사용되었던 포 하나가 간몬대교 옆에 전시되어 있다. 이 포는 이곳 출신의 아베 현 총리가 프랑스로부터 영구임대로 가져왔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아직도 한국과의 문화재 반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고 있다.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일본은 제국이 되었고, 이를 통해 조선의 강제합병, 만주사변, 중일전쟁, 그리고 태평양전쟁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던 슌반로우와 리훙장이 머물렀던 인조지의 본전은 모두 1945년 폭격을 맞아 전파되었다. 인조지 앞에 대문만 휑하니 남아 있을 뿐이다.

시모노세키 회담 이후 잘못 들어선 길을 마지막까지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일본, 그리고 시세를 잘못 읽음으로써 조약 후 내리막길을 걸은 리훙장의 인생을 보여주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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