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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환수보고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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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14-02-20 13:28 조회5,0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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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의 실록 도장날인 파문

문화재청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는 반환실록 특별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실록 각 책에 '서울대학교 규장각도서지인' 이라는 도장이 찍힌 것을 발견하고, 날인한 경위를 해명하라는 공문을 21일 서울대 규장각에 보냈다.

문화재청 동산문화재과 연웅 과장은 "규장각쪽에서 도장을 왜 찍었는지 또 어떤 규정에 의해 찍었는지 정확히 알아볼 필요가 있어서 요청서를 보냈다"고 말했다.

'환수위'는 서울대가 '반환운동' 과정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다가 도쿄대로부터 실록을 기증받은 사실을 다시 지적하고, 실록의 소장에만 집착하는 모습에 대해 강한 비판을 가했다.

< 서울대 도장날인 - 조선왕조실록에 날인한 서울대 학교규장각 도서 도장 (아래것은 도쿄제국대학도 서인) >

김종은 서울대 규장각 정보자료 관리부장은 "장서인의 날인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자료운영세칙 제5조에 의해 자료의 등록에 명기된 절차로, 수집된 자료로서 보존가치가 있는 자료는 도서원부에 기입하고 등록번호, 장서인, 은인 등을 부여하게 되어 있다"고 말했다. 김 부장은 "장서인은 자료의 이동 경로를 나타내는 기록요소이므로, 잠깐 동안 머물렀다 해도 기록을 남기는 차원에서 장서인을 남겨야 한다"며 "실록의 훼손이 없도록 책 여백에 도장을 찍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경성제국대학 시절에 돌려받은 오대산 사고본 27책에 서울대는 장서인을 날인하지 않았고, 나아가 규장각이 보관하다가 정부기록보존소에 옮겨진 태백산 사고본 실록에도 서울대 장서인이 없었다. 다시말해 서울대는 조선왕조실록에 장서인을 날인한 적이 한번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서관 장서인 날인은 내부 규정에 의한 것이라고 변명했던 것이다.

서울대 날인행위는 오대산 사고본이 국보로 지정예고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믿고 국보에 도장을 날인하는 오만방자한 행위였다. '환수위'는 서울대의 행위를 문화재 훼손 행위로 판단, '환수위' 고문 변호사들에게 자문한 결과, 아래와 같은 답변을 얻었다.

조선왕조실록은 1973년 국보 지정을 위한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 10차 회의(′73.12.19)를 통해 '향후 낙장·낙권이 발견되면 국보에 포함시키도록 한다'고 의결된 바 있었습니 다. 또한 7월 14일 도쿄대와 서울대의 기증식이 끝나면, 19일 국보지정예고를 하기로 이미 공지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번에 반환된 조선왕조실록은 1973년 '문화재위원회 제 1 분과 10차회의'를 통해 이미 국가지정문화재와 동일한 보 호 대상이었고, 또한 국보 지정예고가 되어 있는 상태였 습니다. 그렇다면 서울대는 지정예고 되어 있는 실록에 문 화재청장의 허가없이 '도장을 날인' 한 것이고, 이는 문화 재 보호법 위반으로 볼 수 있으며, 또한 '자신의 소유가 아 닌 재물에 손상을 가한 것'이므로, 형법 366조의 '손괴죄' 의 저촉 여부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환수위는 검찰에 고발조치 할 것을 고려하였으나, 자칫 '실록 소장처를 둘러싼 싸움' 으로 비추어져, 국가적 경사를 망칠 우려가 있다는 판단에 의해 고발방침을 철회했다. 그러나 국보에 대해 함부로 도장을 찍은 서울대의 행태는 뭐라고 변명하든 간에 반드시 역사의 준엄한 질책을 받게 될 것이라고 본다. 또한 그것이 실록의 추상과 같은 기록 정신이고, 서울대 역시 이를 피할 수 없다는 경고를 다시한번 상기시킨다.

돌아온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월정사 국민환영행사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돼 도쿄대에 보관되어오다 환수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93년 만에 고향인 오대산 월정사로 돌아왔다. 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이 고국에 돌아왔음을 고하는 의식인 '환국 고유제'가 11일 오후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사고와 인근 월정사에서 열렸다. 문화재청과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가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93년 만에 귀향한 오대산 사고본을 맞이하기 위해 모여든 신도들과 관광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이날 행사에는 유홍준 문화재청장을 비롯해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 김진선 강원도지사, 열린우리당 이광재 의원, 한나라당 이계진 의원,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 등 각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오후 1시 오대산 사고지에서는 반환 실록을 제상에 올려놓고 유홍준 청장과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초헌과 고유제문 낭독, 아헌, 종헌을 하며 고유제가 거행됐다. 같은 시각 월정사 경내에서는 평창 군민과 신도들이 국악인 김영임씨와 국악관현악단이 펼치는 흥겨운 공연을 감상하며 오대산 사고본의 귀향을 축하했다.

< 실록 반환 행사 - 인사말을 하고 있는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 >

고유제가 끝난 후 3개의 궤에 나뉘어 담긴 실록은 채여에 실려 취타대를 앞세운 운반례 행렬에 의해 일주문에서 월장사까지 옮겨졌다. 행렬을 지켜보던 불자들은 합장을 하며 실록의 귀향을 반겼고 관광객들도 휴대폰과 카메라로 촬영을 하고 취타대의 연주를 지켜보며 관심을 보였다. '문화재를 제자리에'라는 피켓을 들고 행렬을 지켜보던 한 시민이 실록을 향해 큰 절을 하며 "오대산 사고본은 오대산에 있어야 한다"고 외치자 다른 시민들이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실록을 담은 채여가 월사 경내 행사장에 도착하자 유홍준 청장, 정념 주지스님 등이 실록을 무대에 봉안했다. 조선왕조실록 환수 경과 보고와 반야심경 독경, 정념스님과 유홍준 청장의 인사말 등의 순서를 끝으로 행사가 끝나고 조선왕조실록은 이날 오후 월정사 성보박물관에서 전시됐다.

< 실록 반환 고유제 - 오대산 사고에서 열린 실록반환 고유제 (노회찬 의원이 환수위원의 자격으로 잔을 올리고 있다) >

< 조선왕조실록의 모습 - 중종대왕실록 >

< 실록의 오대산 보존을 주장하는 평창군민 >



맺음말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의 해체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조선왕조실록의 환수는 민간이 이룩한 역사적 사건이었으며 약탈문화재 환수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획기적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실록'이 지닌 '문화적 상징성'과 가치를 떠나 일본의 도쿄대로부터 '전국민적 열망'을 모아 환수해온 문화재란 의미에서 더욱 의미가 큰 것이었다. 이를 성공케한 주요한 원인으로는 '월정사'란 당사자가 직접 나서서 '법정소송'이라는 논리로 도쿄대를 압박한 것에 있었다. 도쿄대는 소위 '일본 지성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써, 문화재 약탈자로 지목 받으며 법정소송을 진행한다는 것에 대단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

재판을 진행해서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약탈문화재를 되찾기' 위한 우리 민족의 열망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이 과정을 통해 '실록이 언젠가 우리 민족의 품으로 되돌아 올 인연'을 만들어 가자는 것이 '환수위'의 입장이었다.

반환이냐 기증이냐의 형식을 놓고 많은 사람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제까지 문제제기된 '약탈문화재의 문제'는 대부분 문화재란 '유형(有形)'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환수위'가 목적했던 것도 '종이와 먹'으로 쓰인 실록을 되찾아 오는 것이 아니라 '빼앗긴 민족의 자존심 '과 '실록에 기록된 역사의 정신'을 되찾아 오는 것이었다.

지금 돌아온 실록 속에 '무엇이 담겨져 있는가?'를 헤아려 본다. 일제에 의해 약탈된 문화재를 찾아오는 일은 '식민지시대의 청산'과 관련된 일이고, '민족사의 아픔'을 치유하는 일일 것이다. 철저한 역사의식의 필요성은 비단 '실록' 뿐만 아니라 '약탈문화재 반환' 운동을 추진할 때 명심해야할 과제일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뺏긴 자'와 '빼앗긴 자'가 지닌 입장차이이며, 이 차이를 극복하기위해 '가해자'는 철저히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 참회를 구하는 용기가, '피해자'는 '패배주의를 극복' 하고 무모하지만 '반환' 에 도전하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환수위'는 이런 좌표 위에서 '실록반환' 이란 불가능에 도전해 왔고, 아직도 남은 과제의 해결을 위해 일본 궁내청에 소장된 '조선왕실의 궤' 의 환수에 나서기로 결의하고 '조선왕실의 궤한수위' 란 조직으로 새롭게 개편하기로 결정하였다.

영광스런 승리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새로운 도전에 나섰으며, 이 운동도 언젠가 성공하여 지금처럼 '아름다운 기록'을 작성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부처님 앞에 기도한다. 그리고 언제나 '진실은 상상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한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 해체 성명서로 맺음말을 대신한다.

해체 성명서

조선왕조실록환수위 활동을 종결하며

-이 모든 영광을 민족앞에 바친다

1.우리민족의 빛나는 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이 제자리를 떠난지 93년만의 귀향을 환영한다. 더불어 역사적 소임을 다한 '조선왕조실록 환수위' 활동을 영광스럽게 종결하고자 한다.

2.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은 1913년 불행했던 근대사의 격동속에 데라우찌 총독에 의해 머나먼 일본까지 끌려간 뒤, 우리의 기억속에서 조차 사라졌었다. 그러나 '환수위'는 2004년 혜문스님에 의해 도쿄대학이 실록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뒤, 실록을 관리, 수호 했던 월정사와 실록을 조사 연구한 봉선사를 중심으로 시민단체 및 국회의원 등과 함께 '조선왕조실록환수위' 를 구성 2006년 3월 3일 정식 출범하였다. 그 뒤 대사관과 도쿄대에 반환요청서를 전달하고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 , '재일본거류민단' 등과 연대했으며 세 차례에 걸쳐 도쿄대와 반환협상을 추진한 끝에 오늘의 귀향을 이루었다.

3.환수위는 반환협상을 추진하면서 "강제징용에 끌려간 형제를 찾는 마음으로 위안부로 잡혀간 누이를 찾는 마음으로 협상에 응하겠다"는 의지를 밝혀왔다. 우리는 약탈당한 문화재를 당당하게 반환 받는 입장을 견지했고 그 외에 어떤 타협도 하지 않기로 했다. 따라서 이번 환수운동은 1965년 한일협정 당시 '문화재 청구권 소면' 과 '반환 아닌 인도 및 기증' 이라는 한계를 극복하는 것을 핵심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성과를 앞두고, 도쿄대가 서울대에 실록을 기증하고, 서울대가 아무런 비판없이 도쿄대의 제안을 수용함으로써 남북한 불교도, 일본 동포사회, 국민모두의 지지와 연대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승리' 의 영광이 퇴색된 안타까움이 남는다.

4.우리는 오늘의 감격스러운 조선왕조실록의 귀향이 '상처받은 민족혼의 회복' 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조선왕조의 패망과 더불어 실록은 일본에 의해 마무리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우리는 "일본에 의해 빼앗긴 실록을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다시 찾아왔다" 는 구절로 실록이 마무리 되기 바란다. 이로써 우리는 실록반환이 패배주의에 빠져 허우적 대던 과거사를 넘어, 승리와 희망, 도전의 역사로 전환되는 계기로 다져지기 바란다.

5.'조선왕조실록 환수위' 는 영광스럽게 활동을 종결 하지만, 아직도 오대산 사고를 떠나 돌아오지 못하는 중요 문화재의 환수를 위해 새롭게 개편될 예정이다. 우선 우리는 오대산 사고에서 약탈되어 일본 궁내청에 소장된 '조선왕실의궤의 환수를 위하여 '조선왕실의궤한수위' 를 구성, 지속적인 약탈문화재 환수 운동을 전개할 것이다.

6.자칫 무모해 보였던 실록 반환운동의 첫걸음을 내디딜 때, 많은 이들의 빈정거림과 외면에 아랑곳 하지 않고 함께 해주신 동지분들게 감격스런 영광을 함께 하고자 한다. 실록 수호의 책임을 진 '실록수호총섭' 으로써 민족과의 약속 을 지키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 실록의 조사과정과 약탈 문화재 관련 자료 지원을 해주신 봉선사 주지 철안스님, 운동의 시작부터 믿음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2000만 불자 · 북조선 불교도 연맹 · 재일본거류민단 · 국회의원 모임 · 재일동포 김순식 · 이춘희 변호사 · 국내 언론 및 KBS 도쿄 특파원 김대회 기자 등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또한 온갖 고생 끝에 도쿄대가 소장하고 있는 실록의 촬영에 성공, 반환운동에 커다란 도움을 준 MBC 시사 매거진 2580 백승규 기자와 취재팀에게 다시 한번 감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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