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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의 인문학 - 마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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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14-09-29 19:01 조회4,8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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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산 파노라마
    

ㆍ기이한 신성한 그리고 섹시한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가장 특이한 산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전북 진안의 마이산이 첫째일 것
같다. 어마어마한 두 돌봉우리가 희한한 모습으로
솟구친 마이산을 보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다.
진안지역 주민들은 마이산을 어떻게 생각할까?
괴이한 산으로 받아들일까? 오랫동안 마이산을
어떻게 보고 대했고, 어떤 관계를 맺어 지금에
이르렀는지, 마이산 문화사에서 그 대답을 찾아
보기로 하자.


마이산은 경관, 지형·지질 등 여러 측면에서
이질적이라고 할 만큼 두드러진다. 경관이
특이하다 보니 2003년에 국가 명승(제12호)으로도 지정되었다. 지형·지질적인 형성 원인도 남다르다.
1억년에 걸쳐 원래 호수 바닥에 퇴적되어 굳어
있던 것이 지각운동에 의해 융기하면서 침식되고
남은 모습으로 밝혀졌다. 자갈, 모래, 흙이 콘크리트 반죽처럼 쌓인 봉우리 역암층으로는 그 규모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마이산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살펴보면 흥미롭기
까지 하다. 마이산처럼 기이한 산, 신령한 산,
꺼림칙한 산 등 여러 시선의 파노라마가 다채롭게
드러나는 산이 있을까 싶다. 여기에는 각각의 사회
문화적 시선과 견지가 반영되어 있다.


마이산은 말의 두 귀 모양으로 생겼지만 여러 방향
에서 보면 남근이나 곰보의 얼굴처럼 다양한 모습과 질감으로 나타난다.


■ 신비스러운 외양 예로부터 숭배 대상으로


기이한 생김새로 본 것은 옛사람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김종직(1431~1492)은 마이산을 보더니
“하늘 밖으로 떨어진 기이한 봉우리, 뾰족한 한 쌍이 말의 귀와 같네”라고 놀라워했다.

조구상(1645~1712)은 “옥 봉우리 쌍으로 서서 높은 하늘에 꽂혔구나”라고 감탄했다. 운무를 걸치고
있는 마이산의 모습은 신비스러움으로도 비쳤다.

조찬한(1572~1631)은 이를 보고 “봉황이 부리를
일으킨 듯, 용의 귀가 잠긴 듯”하다고 비유했다.
이 모두 사대부 지식인 계층이나 외부 유람객이
마이산을 본 시선이다. 마이산을 구경의 대상으로
보고 놀람과 감탄으로 반응하는 패턴이다.


마이산의 신비스러운 외양은 지역과 국가의 신앙적인 숭배로 이어졌다. 산에 인접한 외사양마을과 화전(꽃밭쟁이)마을 주민들은 가뭄이 들어 비를 기원할 때 마이산 꼭대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신령한 산(靈山)이었기 때문이다.

마이산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나라의 제사를 받은
명산이었다. <삼국사기>에 소사(小祀)의 대상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마이산 산제사는 고려와 조선후기까지도 이어진 듯하다.

영조 때 편찬된 <문헌비고>(1770)에 “지금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고 적고 있다.
그것이 조선말 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흐지부지되다가 1984년에 다시 마이산신제로
부활되었다.

마이산의 신성성에 대한 주민들의 집단무의식이
유지되어 지역공동체 차원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 주민에겐 신성함, 지배층엔 꺼림칙한 산


마이산이 주는 장소 이미지는 종교적 신성과 결합
하여 요소요소에 상징 경관이 형성됐다. 예부터
마이산은 기도터로 유명했다. 마이산에 있었던
혈암사, 쇄암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된 옛 절이었다.

마이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돌탑군도 우뚝 선
암·수 마이가 빚어내는 분위기와 연관하지 않고선
상상할 수 없는 조형물이다.

숫마이봉 아랫도리에 천연동굴이 있고 맑은 샘이
나오는데, 그 동굴도 화엄굴(혹은 화암굴)이라는
불교적 명칭이 생겼고 샘물을 마시면 득남한다는
신비로운 전설도 붙었다.


그런데 마이산은 기괴한 생김새 때문에 꺼림칙한
산으로 상반되게 인식되기도 했다. 마이산의
기이함은 보는 이에 따라 거부감으로도 비쳤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마이산을 둔 고을 이름도 ‘진정시키고
안정시키다’라는 뜻의 진안(鎭安)이라고 불렀다.

신라 왕조 때의 일이다. 고려와 조선에서도 마이산에 대한 중앙 권력층의 경계의식은 계속됐다.
고려 태조가 금강 이남 지방은 산의 모양과 땅의
형세가 (왕도를) 등지고 거역한다고 유훈(훈요십조)에서 말했는데 조선조에는 말이 더해져서 계룡산에서 마이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와 금강의 물줄기가 활과 화살 모양(公자)을 이루어 개성뿐만 아니라
한양까지 겨누는 형국이라고 했다.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에 기록된 이야기다. 그렇다면 계룡산은 서울을 겨누는 화살촉이고
마이산 맥인 금남정맥 줄기는 화살대며 마이산은
화살대 끝의 시위를 먹이는 형국인 셈이다. 중앙의 정치권력이 지역적 편견을 개입해 마이산을 본
시선이다.


이렇듯 같은 마이산이라도 보는 시선과 대하는
태도는 사회적 계층에 따라 다르고 문화적 관점에
따라서도, 시간적·공간적으로도 달랐다.
외부 유람객과 내부 주민들의 견지도 같지 않았다.
진안의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미술시간에 마이산을 그리라고 했더니 사는 곳에 따라 모두 다른 모습으로 그렸다는 재미난 이야기도 있다. 지역주민들이
마이산을 보는 내부적 시선은 어떻게 나타날까? 친밀하고 친숙하게 보는 점이 크게 다르다.


■ 두 봉우리 ‘부부 산신 민담’ 세계서 희귀


마이산 두 봉우리로 이루어진 생김새는 암수에서
나아가 부부 혹은 부모로 인식되었다.
암마이(686m)·숫마이(680m)로 본 것은 일반적인
시선이라고 할지라도, 부부 산신이라는 전설은
진안지역에 구전되는 것이다. 부부 산신이 승천할
새벽 무렵에 한 아낙네가 물 길러 왔다가
“산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외치는 바람에 그만
지금 모습대로 주저앉았다는 이야기다.

한국에 산의 수만큼 많은 산신들이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 처녀 산신은 있어도 부부 산신은 마이산이 유일한 것 같다.

세계적으로도 부부 산신 민담은 희귀한 사례임이
분명하다. 또한 진안지역에서는 마이산 두 봉우리를 어미봉(母峯)·아비봉(父峯)으로도 불렀다.

“동쪽 것은 아비이고 서쪽 것은 어미로, 서로 마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진안지>의 기록이다. 한국에 어미산(母山)과 형제봉은 흔히 있지만 어미봉·
아비봉이 나란히 있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
지역주민이 아니고선 이렇게 부부나 부모처럼
가족적으로 마이산을 보고 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지역주민들에게 마이산은 삶 속에 들어 있는 생활
공간이었다. 생활 속의 마이산을 들여다보자. 진안읍 반월리 주민들은 논밭에서 일을 하다가 마이산과
해의 거리를 보고 시간을 짐작했단다.

마이산이 해시계인 셈이다. 어떤 마을에서는 비가
안 와 다급할 때 마이산을 과감히 이용(?)하기도
했다. 암마이산 정상에 올라가 하늘 제사를 지낸
후 돼지를 잡아 피를 흩뿌렸던 것이다. 신성한 명산을 더럽혔으니 천지신명이 노해서 비를 내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외사양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다. 마이산을 구경왔던 사람이 산이 잘 보이는 곳에 정착해 살면서 형성된 마을도 있다. 진안읍 사양동이 그랬다.


진안지역에서 풍수로 해석되거나 평가했던 마이산의 모습은 또 어땠을까? 사회계층이나 보이는 위치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마이산의 우뚝 선 봉우리가
붓같이 생겨 문필봉이라고 좋게 보는 편이 있다.

지역에 과거급제자와 인물이 많이 나기를 바라는
시선이다. 그런데 어떤 마을에서 마이산은 마을
안을 빠끔히 엿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규봉(窺峰)
이라고 해 흉하게 친다.

또 어떤 마을에서 마이산은 곰보 얼굴(풍화혈 현상) 같고, 어느 마을에서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사나워
보이기도 한다. 거대한 남근석으로 보여 풍기문란이 일 것 같은가 하면, 삐죽삐죽한 봉우리에 화기가
비쳐 마을에 불기운이 불 것 같기도 하다.
마을사람들이 이런 부정적 평가에는 어떤 태도를
보이고 대응했을까?


■ 주변 고을·마을서 ‘부모의 산’ 굳은 믿음


마이산에 대해 그다지 좋지 않은 풍수적 해석도
있었을지언정 주민들에게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마을공동체가 대응한 것은 고작 마을
입구에 자그만 숲 울타리를 조성해서 가림막을 친
정도다.

진안읍에 가림리라고 있는데, 내(川)가 갈라져서
유래됐다고도 하지만 숲으로 가렸다 해서 붙은
지명이라는 해석도 생겼다. 그러나 그것도 마이산을 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마을이 좋으라고 숲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왜 주민들은 부정적 해석에 크게 개의치 않고 마이산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지녔을까?

 

오랫동안 내려온 마이산의 명산 의식이 굳건히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어떻게 비유하고 해석하든 주민들에게 마이산은 고을과 마을을 지켜주는 신성한 영산이었다. 더욱이 주민들의 생활공간 속에 든 마이산은 부부와 부모로 은유되는 가족 관계의 산이었다. 이런 마이산에 대한 주민의 혈통의식은 비록 그 모습이 칼처럼 사납든 못생긴 곰보이든 흉측한 남근석이든 아무 상관없이,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도 고맙고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렇게 마이산은 주민들의 생활과 의식 속에 조금씩 녹아들어 갔다. 기괴하게 보이던 산이 아무렇지 않은 평범한 산이 되었다. 일상적인 생활경관이 되었다.


분별없는 평상심이 도(道)라는 선종의 깨우침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진안주민들에게 마이산이 저렇게 희한하게 생겼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묻는 이를 도리어 의아하게 생각하는 눈빛으로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마이산요? 그냥 산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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