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천사지광국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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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09-21 17:46 조회4,336회 댓글0건본문
국보 101호 원주 법천사지광국사탑은 1067년(고려 문종 21) 원주 법천사에서 입적한 해린 스님의 유골을 안치한 무덤입니다.
스님께서 입적한 후 원주 법천사 동쪽 산기슭에 탑을 세운 것은 1085년, 지광국사탑을 조성하는데 무려 18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린 것입니다.
그 만큼 탑 조성에 고려의 국력과 장인의 정성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광국사탑은 이전의 고승들의 무덤인 팔각원당형 승탑과는 전혀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형식도 다르지만 탑의 기단에서부터 상륜에 이르는 각 부재의 표면에 새긴 조각들은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미술사학계의 견해는 이 탑의 모습과 표면 장식 문양들은 멀리 서아시아의 영향을 그대로 전해 받은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계 여러 나라와 활발하게 무역을 했던 고려의 국력이 그대로 반영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추측하자면 이 탑을 세운 사람들은 당시 개성 앞 바다의 국제 무역도시인 벽란도를 통하여 고려에 들어온 페르시아 사람들의 영향을 받았거나, 고려의 장인들이 페르시아에 가서 그들의 문화를 둘러보고 지광국사탑을 설계하고 조각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당대 뛰어난 장인의 솜씨와 고려의 국력이 반영되어 세워진 지광국사탑은 스님이 돌아가신 후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합니다. 비가극의 서주는 1598년 임진왜란, 원주는 고대로부터 교통의 요지로 한반도 중심을 동에서 서로 관통하는 남한강 중상류의 수운 도시입니다.
또한 경상도 평해에서 부터 한양과 개성에 이르는 '평해로'의 거점도시이기 때문에 전쟁이 나면 군마의 이동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신라시대에 세워져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한 법천사는 임진왜란 때 병화로 불타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남은 흔적이라고는 돌로 된 석탑과 비석, 주춧돌과 기단뿐입니다. 절이 사라진 폐허에 흙먼지가 쌓이고, 퇴적된 페허에는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해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흙에 묻힌 법천사의 탑과 기단, 주춧돌은 절터에 들어온 사람들의 민가 건축에 쓰여 지거나 방아돌과 냇가의 빨래돌로 쓰여 지기도 했습니다.
더 큰 참화는 일본에 의하여 국권을 완전히 상실한 이듬해인 1911년 9월, 일본인 골동상 모리는 해린 스님의 무덤인 지광국사탑을 사들여 서울로 가져가 일본인 실업가 와다에게 팔아 넘깁니다.
1912년 5월 와다는 그의 정원 장식품으로 관상하던 지광국사탑을 오사카의 재벌 후지타 헤이로에게 3만1천500원에 팔아 넘겨 일본으로 밀반출됩니다. 이렇게 일본까지 건너간 지광국사탑은 우여곡절 끝에 3년 만인 1915년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고향 원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게 됩니다.
6.25 전쟁 때에는 폭탄을 맞아 1만2천여 조각으로 산산히 부서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스님의 무덤은 스님이 바라지 않던 아픔을 온몸으로 겪게 된 것입니다.
또 다른 관심은 보존처리를 마친 후 지광국사탑의 거처에 대한 문제입니다. 원래 탑이 있었던 곳은 원주 법천사지 동쪽 법천사지가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입니다.
1085년 스님의 묘탑을 세울 때 지광국사 해린 스님의 삶과 탑을 세우게 된 연유를 기록한 지광국사현묘탑비도 함께 세웠습니다. 지광국사현묘탑과 탑비는 떼어놓을 수 없는 한 몸, 함께 있어야할 세트 문화재입니다.
지금 원주 법천사지에는 탑이 떠난 후 105년 째 비석만 홀로 남아 주인 없는 빈터를 지키고 있습니다. 1912년 일본으로 팔렸다가 1915년 돌아온 지광국사탑은 스님이 살아생전 그토록 염원했던 고향 법천사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일제가 뿌려놓은 식민제도와 유산을 청산하지 못한 조국에서도 지광국사탑을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고려의 백성들로부터 존경 받았던 국사 해린스님의 묘탑은 박물관 뜰의 전시품으로 기능하거나 조선의 정궁 경복궁 뜰 은행나무와 어울리는 풍경으로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문화재는 원위치에 있어야 더욱 빛을 발한다는 원칙은 지난 세기동안 우리사회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공허한 말일 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해린 스님의 묘탑이 겪은 식민과 이산의 아픔, 전쟁의 상처가 이번에는 온전하게 치유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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