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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돌아보며

일생패궐(一生敗闕)과 이생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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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7 01:45 조회1,3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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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청년들 사이 에서는

줄임말을 사용하는 게 유행 이다.

우유남(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남자),

내또출(내일 또 출근한다),

갑분싸(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진다)

줄임말이 아니면 대화가 힘들 정도다.

이에 관한 세간의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지만,

다음과 같은 줄임말을 접하면,

눈앞이 캄캄해질 수밖에 없다.

자낳괴’. 청년들이 자신을 이르는 말 이라는데,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라는 뜻이다.

이생망은 또 어떤가?

이번 생은 망했다의 줄임말인데,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 해도 충격이 가시지 않는다.

스스로 괴물이라 칭하고,

이번 생은 망했다며 자조하는 우리나라의 청년들.

흔히 청년을 미래라고 여기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는 셈이다.

이럴 때 쓰는 위로의 말이 있다.

전부 그런 게 아니라 극소수의 경우이다, 라는 말.

진짜 그렇기를 바랄 뿐이다.

이처럼 청년들이 극심한 자괴감에 빠지게 된 데에는

지금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깔려있다.

힘들게 일해도 임금 상승률은 집값 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하고,

평생 일해서 번 돈으로는 집 한 채 마련하기 어렵다.

기술의 발전은

언제 내 일자리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금수저 흙수저 논란에서 보듯이

애초 출발점 자체도 천지 차이다.

강남 출생이거나 부모 찬스훨씬 윗길에 있다는 현실을

자연스레 체득하며 성장했다.

극심한 경쟁은 어릴 때부터 이어져 온 생애를 지배한다.

여기에 양극화까지 더해져

공한 10%에 들지 못한 나머지 90%

그야말로 이생망이다.

그러다 보니 청년들은 열심히 사는 것보다

대박을 터뜨릴 재테크에 몰두하고 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청년들이

엄빠(엄마 아빠)’의 돈과 인맥과 능력으로

좋은 대학과 직장에 들어가고,

증여로 내 집을 갖는 동안,

대다수 청년은 공시에 매달리고

최저 시급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벌고,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조금이라도 높은

랭킹의 대학과 직장을 찾아 이동하다가

이제 영끌 개미가 돼

금융자본주의의 떡고물을 얻기 위해

다른 노력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다가 이번 생을 포기하는 탈락자들이 생겨난다.

지난해 우리나라를 몰아친 비트코인 열풍도 마찬가지다.

개미가 선수를 이길 수는 없다.

극소수 성공한 사례가 더러 있지만,

그건 정말 하늘이 내린 행운일 뿐이다.

청년들은 이런 대박(을 기대하는) 재테크

망한 세상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동아줄이라고 생각하는데,

대부분 썩은 동아줄일 확률이 높다.

뼈아픈 이야기지만,

우리 기성세대는 이 세습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과 차별 없이

연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난

한국불교 최고의 고승대덕(高僧大德) 한암 스님은

자전적 구도기를 한 권 남기셨다.

이 저서는 한암 스님의 생애와 사상, 오도(悟道) 과정 등을

자서전 형식으로 적은 것으로,

20cm, 길이 120cm의 한지에 만년필로 적은 두루마리 본이다.

서체로 볼 때 한암 스님이 구술하고

수제자인 탄허 스님이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제목이 일생패궐(一生敗闕)이다.

번역하면 이번 생은 크게 망했다이다.

이번 생은 크게 망했다?

청년들의 자조 섞인 줄임말

이생망과 같으니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뜻은 정반대다.

이생망이 절망과 좌절을 이야기하는 반면,

일생패궐은 긍정의 힘을 내포하고 있다.

한암 스님은 말씀하시기를 이번 생은 망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살아있다.

사계절 순환처럼 내 일상도 반복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숨을 쉬고 있다.

계절의 반복처럼

나는 수없이 실패하고 절망하고 비통해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번 생은 망했다라고

낮게 읊조리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걸을 것이다라고 포효하셨다.

끊임없이 지고 또 져서

자신을 넘어서기.

그리고 마침내 만나게 될 자유. 참패 선언이 제대로만 이루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대성공이다.

이런 망한 세상을 만든 기성세대로서 몹시 부끄럽지만,

청년들에게 권하고 싶다.

역설의 힘을 믿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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