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國難)극복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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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행 스님 작성일19-05-21 11:04 조회3,235회 댓글0건본문
금년 2019년 기해(己亥)년 년초부터
한반도의 비핵화에 따른 민생(民生)을 외면한채
국론(國論)의 분열이 가증되고 있다.
선조때 대국난(임진왜란)이 닥쳐 올 것을 예견한 선지자들이 많았는데
예를 들어
이토정(李土亭)이나 남사고(南師古)와 같은 철인들 말고도
정치지도자로서 이율곡선생같은 분들이
어떻게 국운을 미리 내다 보았으며
그들의 대책은 어떻게 평할 수 있을까,
또한 서산대사나 송운대사(사명당)의 활약을
어떻게 보아야하는지
오늘날 현실에 비춰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인재들이 무수히 많았으며
그들은 자신의 예지본능으로
닥쳐올 국난에 대하여 예견하고
그 대책에 부심했던 사실이 많이 있습니다.
당시 잘 알다시피 당쟁에 급급하여
주전파(主戰派)와 화의파(和議派)가 갈라져서
국론(國論)이 분열되었지만
정치 군사적인 대비책을 서둘렀어야 한다는
정치지도자나 철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선조이전 명종때 사람으로
강원도에 살던 남사고라는 사람은
풍수 천문(風水天文), 복서(卜筮), 상법(相法)할 것 없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결을 갖고 있어
그가 말하는 예견치고 맞지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명종말년에 일찍이 말하기를
「머지 않아 조정에는 당파가 생기겠고 또 오래지 않아 왜변이 일어나리라,
그런데 만약 진년(辰年)에 일어나면 오히려 구할 길이 있지만
사년(巳年)에 일어나면 구하기 어려우리라. 사직동에 왕기가 있으니
마땅히 나라를 태평케 할 임금이 거기서 나오리라」했습니다.
그의 예언은 그대로 들어 맞았는데
조정에는 乙玄年부터 비로서 당파가 생겼고
왜란은 임진년에 일어났으며
선조대왕은 사직동 잠저(潛邸)에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었던 것입니다.
선조때 화의파로
유성룡보다 앞서 영의정을 지냈던 동고대감은
일족(一族)의 호신만을 위했으며
지금 자하문 근처의 성벽에 비상구 하나를 만들어
그 문을 통해 선조가 피난길을 갈 수 있었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다가
당쟁으로 쫓겨난 이이(이율곡)선생 같은 분은
임진강 강변에 정자를 지어 놓아
선조가 피난길로 야밤에 정자를 태워
그 불빛으로 임진강을 건너 피난하였다.
그는 이러한 대란을 예견하고
난에 대처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자기의 직위를 걸고 노력을 했고
비록 난은 피할 수는 없지만
극복해야 하며 극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선진국 대열의 입구에서
이런 국론분열의 일은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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