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지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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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행스님 작성일18-07-01 07:23 조회3,103회 댓글0건본문
강산이 두 번 바뀌고(20년) 미륵사지 석탑이 돌아왔다.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서탑·국보 11호)은
백제 무왕대(600~641년)에 창건된 국내 최고(最古)의 석탑이니
그 가치는 필설로 다할 수 없다.
하지만 수수께끼 투성이다.
우선 미륵사는 무왕과 혼인한 선화공주가 창건한 사찰이라는게 정설이었다.
그런데 2009년 석탑 심주석에서
‘백제 좌평(16관등 중 최고벼슬) 사택적덕의 딸이자 백제왕후가 발원한’ 사찰이라는
명문이 나와 파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선화공주인지, 사택적덕의 딸인,
아니면 두 사람 모두인지 미륵사 창건의 주체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또 일제강점기인 1910년 12월
일본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붕괴 직전에 놓인 석탑을 확인했다.
이미 뒷면은 무너져 내렸고 앞면도 6층만 남아 있었다.
그것도 6층 옥개석이 아슬아슬 걸려있었고,
누군가 탑의 완전붕괴를 막으려고 받쳐놓은 고임돌이 보였다.
긴급보수가 필요했다. 1915년 조선총독부는
붕괴직전인 석탑의 뒷면을 콘크리트로 싸발랐다.
“일제가 흉물스럽게 콘크리트를 발라놨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현대적 의미의 콘크리트는 19세기 중반 발명됐고,
그로부터 50년 정도 뒤에야 미국에서 상업화에 성공했다.
미륵사지 석탑 긴급보수에 당시로서는
나름 신공법인 콘크리트를 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콘크리트 성분(탄산칼슘 등)은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표면이 하얗게 변하고 부서지게 만드는 백화현상과 풍화작용을 촉진한다.
당시에는 첨단으로 여겼던 콘크리트가
석조문화재에 악영향을 끼친 것이다.
게다가 미관상으로도 보기 싫다.
화강암에 맞지않은 석회암 성분(탄산칼슘)사이라니….
1998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해체복원공사를 위해
콘크리트를 걷어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콘크리트 두께가 최대 4m에 달했고, 무게는 185t이었다.
해체복원팀은
수작업으로 석재에 들러붙은 콘크리트 가루를
한알 한알 떼어내야 했다.
그렇게 20년이 걸린 ‘거북이 해체복원 공사’가 드디어 마무리됐다.
1910년대 무너진 그대로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지금도 탑의 높이를 두고도 7층설과 9층설 등이 분분하다.
그러니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완전체 복원’이란 어쭙잖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석탑의 규모는 상상 이상이다.
남아있는 탑의 무게만 1800t에 달한다.
탑이 온전했다면 최고 2700t에 이르렀을 것이다.
석탑에 사용된 부재만 3000개가 넘었다.
마지막 수수께끼가 있다.
백제인들은 대체 왜 이렇게 무겁고 버티기 힘든 돌탑을 쌓아갔을까.
애써 쌓은 돌탑을 아마도 거의 매일처럼 관리해야 했을텐데….
동아시아 최대,최고령 백제석탑으로
100톤이 넘는 콘크리트를 일일이 떼고,
20년의 수리보수 대장정을 마친 것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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